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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소연 Jul 30. 2023

세상에서 가장 고요한
나만의 처소

여름의 초입, 나는 제주 지역을 4개월간 여행한 끝에 조용한 마을에 집을 얻게 되었다. 마당이 있는 작은 집이다. 온종일 마당에 무성히 자란 잡초들을 베어냈다. 낫을 들고 땅 위에 쭈그려 앉아 이 땅과 가까워지려는 듯이 깊게 뿌리 내린 이름 모를 풀들을 뽑아냈다. 


‘세상에서 가장 고요한 나만의 처소’. 이곳을 나는 이렇게 명명하고 싶다. 고독과 햇빛과 바람과 별이 있는 곳. 나는 땅 위에 온종일 몸을 숙인 채 박경리와 에밀리 디킨슨을 생각했다. 언젠가 박경리 작가를 인터뷰한 다큐멘터리에서 그녀가 오전 시간에 대부분 밭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허리가 좋지 못한 그녀는 쭈그려 앉지 못해 땅 위에 철푸덕 몸을 엎드려서 고추를 땄다. 옷이 더러워지는 것쯤이야 그녀에게는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그녀는 뱀처럼 땅 위를 기어 다니며 대지를 끌어안을 기세로 밭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생각하며 잡초를 뽑아내던 나는 어떤 희열을 느꼈다. 온몸으로 땅과 가까워지는 일. 나는 이 땅에 어떤 모종들을 심을지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나는 알 것만 같았다. 내가 오직 원하는 것은 고독과 육체노동 그리고 글을 쓰는 일이라는 것을. 그것이 이 고요한 처소에서 가능해지게 된 사실에 나는 기쁨을 느꼈다.

나는 추방되었고, 내가 있던 곳에서 아주 멀리 떠나왔다. 그리고 새로운 정착지를 발견했다. 어머니가 나를 그녀의 세계에서 추방하지 않았다면, 나는 결코 새로운 땅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밤은 엄마처럼 노래하며 별을 맞으러 나온다. 별은 인간적인 다정함을 품고 피어난다. 별이 빛나는 밤, 인간다워진 하늘은 세상의 고통을 이해한다. 

순수의 노래는 비가 되어 평원을 씻어 내리고, 서로 경멸하는 인간들이 만들어낸 비열한 세상의 대기를 씻어 내린다. 쉼 없이 노래하는 여인, 그 노래로 고귀함을 얻은 하루가 별을 향하여 숨을 불어내며 일어난다! (...)

대환란이 닥치면 사람들이 자신들이 등불로 여기던 돈이나 아내나 애인을 잃고는 그제서야 네가 진정한 부자였음을 알리라, 가진 것도 없고 아이도 없이 적막한 집에 있을지라도 그 등불의 빛이 네 얼굴을 감쌀 테니까. *    


바람이 거센 이 처소는 밤이면 모진 바람들이 정원의 나무들을 흔들어제끼고 그 나뭇가지들은 끊임없이 유리창을 두드리며 문을 열어달라 외친다. 예전의 나였다면 두려움에 떨며 그 소리들이 자아내는 광기 어린 외침들에 몸서리를 치며 몸을 웅크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나는 문을 활짝 열고 마당으로 나가 온몸으로 바람을 맞고 휘어진 나뭇가지들과 몸을 비트는 정원수들과 땅 위에 포복한 잡초들을 살핀다. 쓰러진 빈 화분도 제자리에 가져다 놓는다. 그리고 평상에 누워 온몸으로 쏟아지는 별들을 받아낸다.


이곳은 적막하고, 나는 혼자다. 아이도 동물도 없이 오롯이 이 고요함을 받아들인다. 이 집에 이사 오느라 가진 돈도 바닥이 나버렸다. 그럼에도 나는 마치 이곳에 오기 위해 태어난 자처럼 깊은 평온함 속에 놓여 있다. 어떻게든 살아내 보자, 이 낯선 땅 위에서, 하고 생각해본다. 이곳에서 쉼 없이 계속해서 글을 써나간 그 하루는 나에게 가장 고귀한 하루가 될 것이다. 나의 언어는 추방된 자들을 위한 변방의 언어가 될 것이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처럼 무명의 삶을, 변방의 삶을, 가장 낮고 비천한 곳에 피는 꽃과 잡초들의 삶을 나는 믿는다.

어머니, 당신의 숨결이 이 땅의 모든 곳에 스며 있다. 나는 당신의 숨결로 비로소 숨을 쉬고 아픈 것들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는 당신을 여기에 낳고 당신이 대지 위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목격한다. 정원에 청아한 노란색으로 피어난 알라만다 카타르티카. 그 수줍은 빛은 당신의 별이다. 멀리서 우는 개들의 울음은 당신의 울음이다. 세상에 생명을 품고 태어난 모든 것들의 울음이다. 나는 그것이 아프다. 태어나서 아프고, 아파서 살아 있고, 살아서 서러운 것들. 


나는 여기서 보낼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생각한다. 봄이면 여기저기서 달래, 부추, 쑥이 자라고 유채꽃이 자라날 것이다. 유채꽃을 다발로 꺾어다 나물을 무치고, 전을 부치고, 겉절이를 담글 것이다. 여름에는 검은 돌담에 주홍빛 능소화가 주렁주렁 피어나 땅 위로 몸을 던질 것이다. 나는 몸을 낮게 숙인 채 그 잔해들을 주워 담을 것이다. 가을에는 메밀꽃들의 운무를 볼 것이다. 낮게 가라앉은 안개들처럼 그 속에서 나는 느릿느릿 걸을 것이다. 겨울이면 마당 위에 소복이 쌓인 눈들이 포실포실 춤을 추다 내 손바닥 위에 내려앉는 것을 볼 것이다. 그 하얗고 차가운 것들을 두 손에 그러쥐고 내 손의 온기로 그것들이 녹아 사라지는 것을 바라볼 것이다. 당신이 사라지듯 내 손바닥 위에 차가운 물의 흔적으로 남은 당신에게 나는 조용히 속삭일 것이다. 살아내겠습니다. 당신을 사랑하듯, 소멸하는 나의 생과 모든 순간들을, 산 능선의 암흑을, 밤의 고독을, 짐승들의 울음을, 살아 있음을 고통을. 밤의 부엉이처럼 응시하며 앞으로 나아가겠습니다.



* 가브리엘 미스트랄 지음, 이루카 옮김, 「예술」, 『밤은 엄마처럼 노래한다』, 아티초크,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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