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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선 Aug 29. 2020

이제 그만 좀 완벽해질 때가 왔다!

이십 대 끝자락에 갑자기 찾아온 불청객, 자궁내막증?


소싯적(?) 잠깐 빠져 살았던 사주팔자, 사방팔방에서 찾아보고 공유하기를 반복했던 수많은 심리테스트들, 한창 과몰입의 끝판왕을 달렸던 MBTI 성격검사. 비슷한 듯 각기 다른 수많은 결과들 속에서 나를 정의하는 뜻밖의 단어가 있었다.


‘완벽주의자’


딱히 두드러지는 재능도, 출중한 외모도 갖추지 못했던 나.

학창 시절 그 누구 못지않은 노력을 쏟아부어가며 대한민국 입시경쟁에서 스스로 만족할만한 결실을 거두고, 극악의 취업난 속에서 뼈를 살짝궁 갈아 넣은 노력과 엄청난 운빨로 취업에 성공했다. 그러나 인생의 모든 스텝에서 ‘적당히, 적당히’를 고집하고, 합리화의 귀재, 자기만족의 영재로 살아온 내가 ‘완벽주의자’라니. 그저 듣기 좋은 포장이려니 하고 넘기기를 몇 차례. 시간은 흐르고 회사에서 직급이 한 번, 나이 앞자리가 한 번 바뀔 때쯤 되니 그 ‘완벽주의자’의 뜻을 어렴풋이 알게 됐다.


바로, 시작부터 화려하게 완벽하게 해 낼 수 있는 일이 아니면 아무것도 자발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나 앞서 복선을 깔아 두지 않았나. 몇몇 재능에는 평타 정도, 운동신경과 체력 방면에 있어서는 평타 이하의 실력을 가진 내가 ‘시작부터 완벽하게 해 낼 수 있는 일’은 제로에 수렴한다. 고로 나에게 있어 완벽주의란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초 극강의 완벽한 게으름’인 것. 그렇다고 태평하고 느긋한 스타일 인가 하면 전혀 그렇지도 못하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부러운 사람은 더 많다. 쓸 데 없는 잔걱정과 잡생각은 끝도 없어서 머릿속은 언제나 욕구불만 상태였다.


코 앞으로 닥쳐오는 크고 작은 시험들, 입시, 취업. 내가 해 낼 수 있을 것 같든 아니든 무조건 뛰어들어 해내야만 해야 하는 것들이 쌓여있을 땐 몰랐던 나의 고질병 ‘완벽주의’. 더 이상 삶이 나에게 명쾌한 숙제를 던져주지 않는 지금, 나의 선택으로 내가 갈 길을 뚫어야 하는 지금, 나는 익숙하고도 낯선 나의 모습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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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작년 가을, 전혀 예상치도 못한 질병과 마주하게 된다.


‘자궁내막증’. 초경을 시작하고 지금까지 심한 생리통 한 번 겪어본 적 없던 나에게는 꽤나 무겁고 뜻밖의 병이었다. 가임기 여성의 10-15%가 겪는 비교적 흔한 질병이면서도, 난임과 불임 여성들의 열에 아홉이 안고 있는 병, 수술 후에도 언제고 재발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서 최장 2년까지 주사를 맞고 약을 먹으면서 월경을 잠시 중단시켜야 하는, 그러고도 끝이 아니라는 상당히 성가신 그런 병.


순두부에 버금가게 유약한 내 마음은 바스러지고,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검색창에 오만가지 무시무시한 검색어들을 조합해가며 안 그래도 가루가 된 마음을 스스로 더 짓밟고 패대기쳤다. 아이를 꼭 가지려고 생각한 적도 없었고, 비혼이나 딩크족으로 사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난임’, ‘불임’과 같은 글자들을 마주하니 마치 원래 내가 가지고 있던 다양한 가능성들을 박탈당한 것처럼 상실감이 밀려왔다.


그러나 나는 다행히도 합리화와 자기만족, 그리고 의미부여에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잔걱정과 두려움의 늪에서 살짝 눈을 돌리고 나니 먼저 주변 사람들이 보였다. 병원 로비에 앉아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잡아준 엄마, 소식을 듣고 수술에 필요하거나 내 마음을 위로할만한 작은 선물들을 준비해준 소중한 친구들, 아무렇지 않은 척 버티다 결국 터져버린 내 울음을 가만히 안아주고 함께 버텨준 남자친구, 그리고 크게 내색하지 않아도 내게 전해진 수많은 배려의 공기들.


내 곁에 그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좀 더 강해지고 싶었다. 그리고 그 따뜻한 사랑과 배려에 대가가 하나 있다면, 내가 이 작은 걸림돌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 밝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해답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바로 내 게으른 완벽주의와 작별하는 것. 그동안 생각만 했던 것들에 도전하고, 성공을 거두는 것. 진료실에 앉아 병명을 듣고 수술 날짜를 잡던 날 느꼈던 무력감, 내 인생이 내 통제 하에 있지 않다는 좌절감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수술까지는 서너 달 남짓, 그동안 상상만 하고 해보지 못한 작은 도전들을 해보기로 했다. 성공한다면 내 인생의 방향키를 내가 조금이나마 다시 쥔 듯한 성취감을 느낄 수 있을 거고, 실패한다면 앞으로의 수술과 치료에 대한 따끔한 예방접종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남들이 보기엔 별 거 아니어도 여태껏 시작을 망설여왔던 것들. 그중 하나는 이렇게 뭐라도 글로 남겨 보는 것이었다. 나의 소소하고 시답지 않은 좌충우돌이 누군가에게 작은 용기가 되거나 하다 못해 피식할 읽을거리라도 된다면 더할 나위 없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그리고 또 하나, 나 스스로에게 다양한 질문을 해보기로 했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어떨 때 마음이 편안한지에 대한 간단한 고찰부터 결혼, 출산, 직업에 대한 나의 가치관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보기로 결심했다.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치열하게 고민하고 노력했던 입시와 취업 등의 것들보다 어쩌면 비교도 안 될 만큼 중요하고 무거운 문제들에 대해 너무 안일하게 넘겨버린 것은 아닌지 반성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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