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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선 Nov 10. 2021

결혼은 '대문짝만 한 커플 타투'

2021년 11월 8일, 소연에게 현지가

소연아, 안녕!


오늘은 짧은 가을에게 아쉬운 작별을 고하게 만드는 참 서늘한 날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요리조리 단풍놀이를 핑계로 쏘다닐 것을, 싶다가도 다가올 겨울은 겨울대로 새로운 재미를 줄 거라고 위로해본다. 너나 나나 끔찍이도 추위를 타니까 채비를 단단히 해야겠지만서도 말이야.


보내준 편지는 잘 읽었어. 미리 그려놓은 ‘시나리오’ 때문에 갈등이 생긴다는 말, 참 잘 와닿는 좋은 표현인 것 같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대사까지 읊조리면서 이런저런 공상을 하는 걸 즐겼는데 세월이 지나니 이게 습관이 되어버렸거든. 그래서 네 말대로 구체적인 기대를 하기도 하고, 때때로는 반대로 실망하게 될 것에 대해 지레 겁부터 집어먹기도 하는 것 같아. 예를 들면 너의 예시처럼 ‘사람이 아프면 이래저래 해줄 수 있었을 텐데’ 등의 구체적인 실망 혹은 ‘아마 내가 아픈 거에는 신경도 안 써주겠지’, ‘내가 이런 말을 진지하게 꺼내도 화를 내겠지’ 같은 섣부른 판단을 하는 거지. 결국은 우리 모두 각자의 사랑하는 방식을 존중하고, 자기 자신의 사랑의 방식을 좀 더 온전한 방식으로 닦아나가야만 하는 거 같아.(관계를 이어나가는 게 목적이라면 말이야.)


말하다 보니 이다지도 끝이 없는 수련을 정말 왜, 어떻게 시작하게 됐는지 정리해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


사실 요새 참 많이 받는 질문이라 여러 번 생각해봤던 내용이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뭔가 결정 내리는 것에 대해 굉장히 망설이는 편이잖아. 하물며 인생이 바뀔지도 모르는 선택인데, 한 순간의 결정으로 되는 것이 아니더라. 결혼이라는 소재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나서 나와 연인은 안 그래도 잦았던 다툼의 횟수를 늘려만 갔어. 이 사람이랑 결혼이라고 생각하고 나니까, 작은 실수나 차이도 그냥 넘기기가 더 힘들어지더라. 아마 상대방도 마찬가지였을 거라고 생각해. 난 연인에게 '너처럼 나한테 화내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이야기했고, 연인은 나에게 '누구한테 이렇게 화내 본 건 나도 처음'이라고까지 했으니까 얼마나 심각하게 전투를 치러냈는지 짐작이 가지?


너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왜 이 사람이었는지', '왜 결혼이었는지' 두 가지에 대한 답이 필요할 것 같네.


첫 번째, '왜 이 사람이었는지'에 대해 짧게 이야기해볼게. 우선 이 사람은 건강한 사랑을 받고 자란 티가 물씬 나는 사람이었어.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가족들에게 과하게 의존하지도 않았고, 챙김 받기보다는 챙겨주는 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었어.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나는 연인의 부모님과 결혼 전에도 꽤 자주 만나게 되었는데 그때마다 두 분이 아직도 서로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이 완전한 타인인 나에게까지 전해졌거든. 자연스럽게 우리의 미래를 대입해보게 되더라. 난 늘 미래를 두려움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인데, 이 사람과의 미래는 두렵기보다는 설레는 마음이 커지더라고.


두 번째, 아마도 네가 더 궁금해할 질문. '왜 결혼이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볼게. 너무 맥없는 이유라고 놀라지는 마. 나한테 결혼은 커플 타투 같은 거였어. 그것도 서로의 이름 석 자를 대문짝만 하게 새기는 적나라한 모양의 타투.


사랑에 미쳐서 한 번은 해보고 싶은 새롭고 즐거운 경험, 사랑한다는 증표로 내 몸에도 새기고 상대에 몸에도 새기고 싶은 무언가. 기꺼이 내가 우상시하는 자유를 반납해보는, 어딘가 비이성적인 사이비 종교와도 같은 것.


한 친구가 결혼을 앞둔 나에게 말했었어. '지금까지 결혼 생각을 진지하게 해보지 않았는데, 주변 친구들이 하나 둘 하기 시작하니 괜히 불안하다'고 말이야. 내가 그때 그랬거든. '결혼은 예를 들면 세계일주 같은 게 아닐까 싶다'고. '경험해 본 사람들은 하나 같이 인생을 바꿔 놓는 커다란 경험이라고 하지만, 안 한다고 해서 그다지 치명적이지도 않은 새로운 경험, 인생의 다양한 랜드마크 중 하나인 거 같다'고 말이야.


결혼과 세계일주, 어떻게 보면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언뜻 한쪽은 속박을 한쪽은 자유를 상징하는 듯 보이니까 말이야. 하지만 난 둘 다 자유로운 선택일 뿐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요새 결혼이 어디,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일이니, 물질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 엄청난 장벽들이 가득하잖아. 이 얘기도 나중에 한 번 나눠보면 재미있겠다.


소중한 사람들 속에서 주인공이 되어 극한의 엔도르핀을 느껴봤던 결혼식, 혼인신고를 하고 구청에서 받았던 귀여운 엽서, 가족관계증명서에 뜨는 '배우자'라는 글자, 남편-이라고 처음 입에 담아보는 단어, '부부'라는 단어만으로 괜히 솟아나는 책임감. 별 거 아닌데 그런 것들이 지금은 너무 재밌어. 스스로 조직과 공동체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자랑하듯 말해온 내가, 피가 아닌 내 선택 내 사랑으로 맺어진 가족을 위해 살아보는 거, 누군가 나를 소유하고 있다는 가상의 감각, 누군가에게 소유되고 있다는 감각 그런 게 참 새로웠어. 이런 즐겁고 따스한 속박이라니, 어쩌면 연애를 시작할 때와 비슷한 감정이 아닐까 싶기도 해.


대답이 싱겁고 바보 같지? 아주 많이 고민해보느라 답장이 조금 느렸는데, 거창한 이유를 대보려 해도 다 거짓말 같더라고.


그럼 이번엔 내가 질문해볼게! 네가 동거를 결정하게 된 이유는 뭐야? 세상이 말하는 여러 가지 핸디캡들을 딛고 부모님들을 당당하게 설득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하다. 정작 너를 완전히 이해하고픈 나조차도 너에게 우려를 먼저 전했던 것 같으니 말이야. 세간의 시선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너의 결심의 순간이 궁금하다.


궂은 날씨에 감기 조심하고,

답장 기다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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