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선선 Dec 03. 2021

자유라는 말로 자유를 빼앗지 않기

2021년 12월 3일, 소연에게 현지가

안녕, 소연아.

내 답장이 너무 늦어버렸다. 간만에 매일같이 야근하는 일상을 보내고 나니 생각하고 글을 쓸 힘이 나지 않아서 오래 걸리고 말았네. 마음이 너무 바쁜 요 며칠간이었다.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여러모로 성장하고 배우는 날들이지 않았을까 그렇게 일단락하고 돌아왔어.


남편과의 근황을 이야기하자면 여전히 우리는 우당탕탕 잘 어울려 지내고 있어.

며칠전 남편이 내 생일선물을 사주겠다고 해서, 둘이 안좋은 컨디션에 하루종일 돌아다니다가 한바탕 다툼이 있었지만 말이야. 당시에는 무진장 심각하게 '내 마음은 차갑게 식었다' 이러면서 인상 팍 쓰고 만 이틀을 버텼는데, 지나고나니 또 한 번 '칼로 물 베기'라는 기가 막힌 표현을 고안해낸 조상의 지혜에 감탄하고 있지.


너의 질문은 간만에 육지에서 발을 떼고 고민을 하게 했어. 야근과 부부싸움, 밀린 집안일 따위의 무심한 현실에서 한 걸음 떨어져서 말이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너의 질문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속은 한 사람으로서의 자유와 상충하는 것일까'에 대한 것이구나.

너의 대답이 '노'라고 했으니 왠지 '예스'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야 할 것 같지만, 유부녀인 내가 '예스'라고 대답하며 글을 시작하면 엄청난 후회의 글이 되어야만 할 것 같은걸?


한 사람으로서의 자유, 나는 그 안에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속이 있다고 생각해.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 결국엔 그거 아닐까. 물론 그 선택에는 책임과 대가와 기회비용이 따르겠지. 하지만 충동적으로 하고 싶은 모든 걸 선택하면서 책임은 지지 않겠다고 한다면 그것이 과연 자유일까? 난 자유는 그렇게 괴상한 모습을 지닌 유아적인 개념은 아닐 거라고 주장하고 싶어.


머리로 계산하든, 마음으로 그냥 알든, 설령 그 판단이 훗날 섣부른 일이었다고 후회할망정, 우리는 남에게 피해주지 않는 선에서 뭐든지 자유롭게 선택하면 된다고 생각해. 내가 관계에 의한 결속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일까? 내가 결속 없음으로 인한 외로움을 버틸 수 있는 사람일까? 스스로 끊임없이 묻고 부딪혀가면서 선택을 내리는 거지. 뭐 그 과정에서 선택을 보류할 수도, 철회할 수도 있는 거겠지. 이 역시 남에게 크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 선에서 자유롭게 선택하면 되는 거고 말이야.


나는 결혼 전보다 자유로운가? 스스로에게 묻는다면 어떤 면에서는 그렇고 어떤 면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있어. 사실 모든 과정이 그렇지. 학교를 가고 취업을 하고 독립을 하고, 그 모든 과정에서 우리는 다 느껴왔잖아. '애 생기면 또 다르다' 그런 말들 사람들 자주 하는데, 나는 뭐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생각해. 앞으로 내가 점점 자유를 잃게 될까? 점점 주연에서 조연이 될까? 지금까지를 돌아보면 글쎄, 모든 건 의미를 부여하기 나름이고 내 인생에서 내가 언제나 주연인 건 아니었는걸.


 '자유로운 영혼' 하면 떠오르는 갖가지 프로토타입이 있지 않아? 거기에 '결혼' '육아' '워킹맘' '직장인' 뭐 그런 것들이 있을리 없지. 근데 난 언젠가부터 자연스레 주입된 히피스러운 이미지들이 나의 자유를 가로막고 있다는 생각도 들더라고. 우리의 일상을 조금씩 후려치게 된달까. 난 지금의 내 일상들이 소중한데, '자유'에 대해 골몰하다보면 내 일상들이 '부자유'의 결정체같이 보이고 그럼 난 거기에 얽매여서 진짜 자유를 잃게 돼.


우리 인생은 어차피 끝나게 돼 있지. 짧다면 짧은 시간에 무얼 채워 넣을지, 그걸 내 의지로 선택할 수 있다면 그게 우리 시대에 가질 수 있는 자유 아닐까. 돈, 시간, 관계, 육체 그 모든 것에서 각자의 제약이 생기겠지만 그것도 각자 적응해야할 몫이겠지. 사실 '정말 자유로운 선택'도 그래서 불가능에 가까울 것 같기는 하다. 돈과 시간은 부족하고, 모든 관계에는 책임이 있고, 육체는 망가지기 십상이니 말이야. 그래서 요새 한편으로는 자유라는 개념이 참 어려운 것 같아. 그저 나는 '자유로워 지고 싶다'라는 욕망보다 '누군가의 자유를 뺏지 않겠다. 그리고 나도 부당하게 뺏기지는 않겠다' 이정도의 톤으로 살아갈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인간의 자유는 인간의 수만큼 혹은 그보다 더 많은 수의 모습을 하고 있겠지? 누군가의 객관적인 상황들을 보며 그 사람의 자유로움 여부를 이야기하는 건 그 사람에게서 자유를 빼앗는 일이라고 생각해. 나는 그저 내 주변인들의 상황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내 스스로의 상황을 비관하지 않는 방식으로 자유를 수호하며 살아가고 싶다.


역시 이럴 줄 알았어. 말하다 보니까 세상에서 제일 심각한 사람인 척 잔소리를 늘어 놓고 말았네.


아무튼 난 결혼하고서도 여전히 자유를 잘 누리면서 살고 있어. 오히려 연애의 불안감과 긴장에서 벗어나서 더 자유로울지도 모르겠다. 친구들과 놀다가 '어, 남편 혼자 너무 오래있는 거 같아서 난 집에 가야겠다' 그렇게 말하며 미간을 살짝 찌푸리기도 하지만, 사실 그 발걸음이 그렇게 무겁지는 않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에게 가는 길인데 발걸음이 무거울리 없지. 어쩌다 한 번 나 혼자 집에 있는 날에 집안일을 몰아하고 남편이 좋아하는 요리를 준비할 때, 그게 조금도 속박이라 생각한 적은 없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할 일을 해주고 웃는 얼굴을 보는 거,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싫어할 일을 하지 않고 잘 지내는 거, 그냥 어쩌면 꽤 심플한 기브 앤 테이크 아닐까? 시간이 지나고 애가 생기고 그럼 또 다르겠지? 그래도 또 모든 게 기브 앤 테이크, 잃는 게 있음 얻는 것도 있을 거라 믿어. 지금까지 모든 일들이 쭉 그래왔듯이 말야.


그럼 소연아, 혹시 동거를 시작하고 나서 뭔가 포기해야했던 것이 있어?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너의 자유를 방해하는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 이 친구와 동거를 하고 있지 않다면 해보고 싶었던 것들이나, 혹은 내적이든 외적이든 갈등했던 것들!


이래저래 생각도 많아지는 나날이야. 시국은 다시 흉흉해지고 날씨도 부쩍 추워졌는데 건강 조심하고, 답장 기다릴게! (다음 답장은 좀 더 서둘러 보도록 할게 ㅎㅎㅎ)


매거진의 이전글 동거는 기회의 시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