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2월 28일 소연에게 현지가
안녕 소연아!
북클럽에서 격주로 얼굴을 마주하는 일에 더해 이번 달엔 우리 집에서 재택근무도 함께 하고, 얼마 전에 너희 집에서 짝꿍들까지 넷이서 포틀럭 파티까지 성공적으로 마쳤네.
각자 마음을 담아 준비한 요리들로 다 같이 배를 채우고, 쉴 새 없이 수다도 떨고, 근육통이 올 정도로 VR 게임까지 하고 정말 알찬 하루였네... 그래서 그 VR 기기 얼마라고?
자주 실없는 카톡 주고받으면서 심리적으로는 늘 가깝지만서도 최근엔 얼굴도 자주 볼 수 있어서 참 좋았어. 우리가 "평생 재택근무"를 부르짖으며 언택트의 수혜자로 살아가는 행운을 누리고 있지만 역시 물리적으로 함께하는 시간은 다른 것으로 대체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도 종종 넷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 좋겠다는 기대를 부풀려 보고 있어. 첨엔 뚝딱거리던 짝꿍들끼리도 이제 어색해 보이지 않아 다행이야.
촐랑이와 함께한 이야기, 그리고 귀한 촐랑이 사진 잘 받아보았어. (하트)
본가에 있는 탄이 생각이 나면서 나도 시뮬레이션해보게 되더라고. 촐랑이보다 덩치도 크고, 보채는 것도 둘째가라면 서러운 데다, 한 번 짖기 시작하면 그 누구도 말릴 수 없는 탄이었다면 아마 우리 부부는 넋이 다 나가지 않았을까 싶다. 사실 아예 경험이 없는 건 아니야. 동물을 좋아하는 남편 덕에 연애하던 시절 탄이를 데리고 두어 번 외출을 해봤었거든. 차에 태우고 멀미할까 살펴가며 이동하고, 잠깐 기다리라고 진정시켜놓고 벤치에서 후다닥 피자 먹고, 애견 파크 같은 곳에서 다른 강아지들과 어울리게 풀어둬 보기도 하고 그랬었어. 근데 정말 귀여운 거랑 별개로 체력과 넋(...)이 금방 방전되어 버리더라고. 내 표정이 계속 굳었는지 짝꿍이 좀 웃어보라고 하기도 했다. 탄이랑 떨어져 지내는 요즘도 매 순간 탄이가 너무 보고픈데, 역설적이게도 탄이 보러 가자는, 혹은 탄이랑 여행 가고 싶다는 남편의 말을 가끔 못 들은 척 하기도 해. 그래서 너의 이번 편지 한 줄 한 줄이 격하게 공감이 가더라.
'둘 만의 시간'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보고 싶어. 내 일상에서 요즘 8할 이상이 '둘 만의 시간'이 아닐까 싶다. 남편과 나 둘 다 재택근무하는 주간엔 거의 9할 이상일지도 모르겠어. 같은 공간에 있으면 각자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둘이 뭐라도 같이 하려고 하다 보니 더 그렇다. 우리 부부의 둘 만의 일상은 주로 함께 운동 가기, 동네 맛집 탐방, 산책하기, 커피 사 오기, 요리해 먹기, 술 한잔 하며 낄낄대기 - 가끔 진지한 대화하기, 드라마 정주행 하거나 영화보기 정도가 있으려나? 콘텐츠로 나열해보고 나니 특별할 게 없으면서도 키워드 하나하나에 깃든 추억이 떠올라서 혼자 슬쩍 웃게 되네. 요새는 혼자만의 시간이 어색해질 정도가 된 것 같아. 나보다 남편이 좀 더 의욕적이고 계획적인 편이라 남편이 없는 날에는 '오늘 하루는 어떻게 보내지'에 대한 계산이 바로 안 서서 정말 무생물처럼 하루를 흘려보내기도 하는 것 같아. 혼자 시간을 보내는 법을 잊어버리는 것 같다는 게 소소한 내 고민이기도 한데, 동시에 혼자 보내는 시간을 다시 예전처럼 좋아하게 되면 그 시간을 잃었을 때 상실감이 너무 크지 않을까 그런 쓸데없는 생각도 해 보곤 해. 나도 한 꼬꼬무 하지? 피곤한 나의 머릿속.
난 사실 남편을 만나기 전엔 연애를 아예 다른 구역으로 설정해두곤 했던 것 같아. 물론 친구들한테 잠깐 소개하거나 해 본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뭐랄까, 나는 연애 상대와 있는 '둘 만의 시간'에 누가 들어오는 게 괜히 꺼려졌거든. 내가 평소 인간관계를 맺어오던 방식을 생각해보면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난 상대에 따라 내 모습을 바꾸는 게 익숙한 사람이라 1:1 만남이 제일 편하고 '위 아더 월드' 모드로 관계를 확장시키는데 서툴었거든. 거기다 '둘 만의 시간'의 빈도가 높지 않다면 그 시간을 온전히 둘이 보내지 못한다는 게 싫기도 했어. 나에게 그만큼 연애는 일상이라기보다 일탈에 가까웠을지 모르겠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남편과의 시간은 일탈보다는 일상이 되었지. 물론 둘 다 꽤 활동적인 성격이니 함께 일탈을 꿈꾸긴 하지만 물리적인 시간이 일상 쪽으로 압도적으로 기울고 있으니 말이야. 짝꿍이 일상의 영역으로 기울고 나니 둘 만의 시간에 누군가를 보태거나, 서로의 인간관계에 발을 들이고 시간을 보내는 게 당연해지고 있어. 게다가 그 시간들, 꽤나 즐겁더라고? 물론 그런 시간 뒤에 둘 만의 시간이 금방 찾아온다는 보장이 있어서 더 즐거운 것일지도 모르겠어. 남편 친구들 내 친구들과 노는 것에 추가로 우리 가족 속에 남편을 보태서 보내는 시간, 시댁 가족들에 섞여서 보내는 시간, 난 지금까진(?) 정말 즐겁다.
1월엔 우리 할머니의 팔순잔치가 있었고, 오늘은 시아버지 환갑 기념으로 점심을 함께 했어. 내가 제일 아끼는 나의 가족들과 내 사랑하는 짝꿍, 내 짝꿍의 소중한 가족들 속에 그 일원으로 앉아 있는 나. 기분이 참 몽글몽글해. 둘 만의 시간도 정말 소중한데,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그 시간도 어찌 됐든 다시 오지 않을 소중한 시간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결혼으로 삽 십 년 가까이 남으로 지냈던 사람들이 가족으로 뿅 묶인다는 게 늘 이상하다고 생각해왔는데 올초에는 왠지 모르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어. 내 남편이라는 이유만으로 짝꿍을 사랑해주는 우리 가족들, 짝꿍의 아내라는 이유로 친딸처럼 친언니처럼 대해주는 시댁 식구들이 참 고마운 요즘이야.
물론 아직도 둘 만의 시간은 행복하고 소중해. 하지만 언제가 됐든 2세 생각을 하고 결혼한 우리 부부는 아마 별일 없다면 둘 만의 시간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겠지? 사실 뭐 그것뿐일까. 너의 말대로 무력한 생명 하나를 온전한 인간으로 길러내기 위해 우리 둘은 모든 걸 뒷전으로 미뤄야만 할 거야. 그게 일이 될 수도, 건강이 될 수도, 어쩌면 우리 둘의 관계가 될 수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임신과 출산에 뒤따르는 몸의 변화? 그건 생각만 해도 우울해져서 사실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잘 모르겠을 정도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2세가 있는 삶을 꿈꾸는 이야기는 다음에 더 길게 해 보도록 할게. 현재 내 머릿속의 결론은 우선 다시 오지 않을 지금, 둘 만의 시간들, 서른한 살 부부의 하루하루를 알차게 살아보기. 그리고 서른한 살 김현지의 인생에 다양한 도전과 즐거움을 꽉꽉 채워 넣기.
아무튼 결혼을 하고 나니 말이야. 우리 2세에 대한 생각을 우리만 하는 게 아니더라고. 올해는 새해 덕담으로 시부모님께 "알아서 잘 계획하겠지만, 아이 계획도 잘 세워서 소식 들려주길 바란다"는 이야기를 들었지 뭐니. 워낙 좋은 분들이신 데다 늘 나를 위해주셔서 그 말을 듣는 게 불편하진 않았지만 갑자기 숙제처럼 느껴진 건 사실이야. 얼마 전엔 할머니랑 통화하는데 할머니가 지나가듯 "내가 그래도 가기 전에 우리 손녀 애기는 봐주고 싶은데"라고 이야기해서 내가 가긴 어딜 가냐고 그런 소리 말라고 역정을 내기도 했다. 시댁도 우리 집도 우리더러 결혼을 왜 이렇게 일찍 하냐고 농반 진반 이야기하셨으면서, 막상 결혼하고 나니 2세 얘기를 곧잘 꺼내시더라고.
아마 너희 동거 생활에는 아직 이런 고민들은 한 참 뒤로 미뤄두거나 혹은 할 필요 없는 것들일 수도 있겠지. 물론 결혼을 하지 않겠다, 아이를 낳지 않겠다, 이런 결정을 하게 된다면 그걸 또 양가 부모님들에게 설득시키는 과정이 만만치 않겠다 싶기도 하지만 말야. 그래도 너와 너의 짝꿍의 성향과 가치관 등등을 알아갈 시간이 좀 더 주어졌다는 것에서 부럽기도 하다. 또 너희가 어떤 선택을 할지도 기대되고.
최근 너와 짝꿍의 공통 고민 혹은 숙제는 무엇인지 궁금하다. 너와 짝꿍에게 결혼이라는 제도는 어떻게 느껴지는지도 궁금해. 결혼이라는 제도가 꺼려지는, 혹은 좀 두렵게 느껴지는 걸림돌 같은 게 어떤 건지도! 출산과 육아가 없는 둘 만의 삶을 꾸린다면 사실 나도 '결혼이 꼭 필요할까' 고민했을 것 같긴 하다. 그리고 동시에 결혼 없는 동거를 선택했을 때 두려운 점들도 있을까?
질문 세례를 퍼부어버렸네. 꼭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더라도 너의 다양한 의식의 흐름 기다릴게.
그리고 우리 넷(?)의 영원한 공통 숙제, 건강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