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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안녕 Dec 23. 2021

마루에서 부르는 아홉 살, 저녁의 노래

 단장의 미아리고개를 넘은 노란 샤쓰 사나이


‘철사줄로 두 손 꽁꽁 묶인 채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 절며 끌려가신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고개~’


미간엔 옅은 주름이 잡히고, 강약과 장단에 맞춰 왼쪽 손바닥은 툇마루를 두드리며 다른 한쪽으로는 원통함을 그러쥔 듯 조막손을 허공에 내던진다.

‘아~빠를 그리다가 어린것은 잠이 들고, 동지섣달 기나긴 밤 북풍한설 몰아칠 때, 당신~은 감옥살이 그 얼마나 고생하고, 십 년이 가도 백 년이 가도 살아만 돌아오소. 울고 넘던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고개~~~’

애끓는 소리는 여린 목울대를 까칠하게 긁으며 빠져나와 클라이맥스로 치닫는다. 마지막 음절에서 물기를 짜내는 걸레처럼 비틀어진 상체가 소리와 함께 부르르 떨린다.


아홉 살짜리가 부르는 ‘단장의 미아리고개’다.

 

‘단장’의 의미가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이라는 걸 알리 없지만, 여자아이의 노래는 한껏 한스러워진다. 

“어머니~ 어머니~ 그 어디에 계십니까. 목 메이~게 불러봅니다~”

이웃에 품을 팔러 간 엄마는 해가 넘어가기 전에 돌아오겠지만 ‘불효자는 웁니다’를 따라 부르는 동안에는 엄마가 영영 떠나버린 것만 같다. 처절하게 울부짖는 시늉으로라도 속죄를 하노라면 엄마가 돌아올 것 같다. 

아니다. 그저 원식이네 대추나무에 걸린 해가 힘을 잃어가는 이때의 쓸쓸함이 야릇하게 좋아서, 설레게 좋아서 계속 노래를 하고 싶다. 


노래를 부르다 보면 뜻 모를 슬픔이 살갗을 타고 자르르 번져가다 어느새 위안에 닿는다.


책가방을 던지자마자 놀러 나간 오빠는 해 떨어져야 돌아올 테고, 방문을 열어둔 작은방에서 늦은 오후 곤한 잠이 든 동생은 누나의 쇳소리에도 아랑곳없다. 안방 창호문 앞에 놓인 담벼락 쌓는 '부로꾸’만 한 카세트에서는 종잡을 수 없는 가사와 곡조가 쉴 새 없이 재생된다.

‘노오란 샤쓰 입은, 말없는 그 사람이, 어쩐지 나는 좋아, 어쩐지 맘에 들어, 미남은 아니지만 씩씩한 생김생김 그이가 나는 좋아, 어쩐지 맘에 들어.’

은방울 자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내 몸을 통통 튕기는 것 같다. 노래에 따라 흥을 보태 몸짓을 한다. 이 노래는 따라 부르다 보면 묘~한 쑥스러움이 들곤 해서 주변을 살피며 누가 들을 새라 목청을 낮춘다. 어떨 땐 아이들과 학교를 오가는 길에 나도 모르게 이 후렴구를 소리 내어 반복하고 있는 걸 알아차리고 홀로 멋쩍어지기도 한다. 그럴 땐 음악시간에 배운 다른 노래로 슬쩍 바꿔치기해 이어 부르면 된다.


세상의 어떤 노래든 모두 연결되어 있다.


장날에 엄마가 카세트테이프를 사 온 후 닳도록 들어서 익숙해졌기 때문인지 은방울 자매는 이름처럼 딸랑거리며 편안하다. 쥐어짜는 것처럼 슬펐다가도 금세 단순한 경쾌함으로 돌변하는 목소리다. 말을 타는 씩씩한 카우보이였다가 아이를 달래주는 엄마가 되었다가 수줍은 사랑을 고백하는 여인이 되었다가 불효를 고백하는 비통한 자식이 되는, 노래로 거듭거듭 변신하는 마술사 자매다.

 

어린 나는 모든 노랫말이 누군가의 실제 이야기라고 믿는다. 


노랫말 속에서 성별이 바뀌고, 어떤 고백은 이해조차 되지 않아도 곡에 따라 가수와 함께 나도 함께 변신한다. 가사를 알아듣지 못해 허밍만 해도, 밝거나 쓸쓸하거나, 애통하거나 씩씩하거나, 가슴이 따르는 대로 주변 공기는 바뀌게 된다. 연극배우처럼 나는 감정을 훨훨 교체한다. 툇마루, 혼자만의 무대에서.


노래는 티브이도 없는 여자아이의 세상을 다른 차원으로 순간 이동해 증폭시킨다.

 

나는 생각한다. 이 마을 밖 사람들도 슬프고 아프다가도 웃고 있나 보다. 그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눈앞 플라스틱 카세트테이프의 커버에 새겨진 은방울 자매 사진이 많은 걸 대변한다고. 화려하게 똑같은 옷으로 차려입은 그니들도 나처럼 웃다가 울다가 그렇게 살아가나 보다고...     

언젠가 은방울 자매가 진짜 자매 사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엄마가 말해주었을 때, 나는 엄마가 자신의 자매들에 대해 기쁘게 이야기할 때처럼 놀랍고, 부러웠다. 


언니도 여동생도 없는 나는 노래를 잘 부르면 자매를 만들 수도 있구나 싶어 쓸쓸해졌던 기억... 


어느새 테이프 뒷면 끝 곡 ‘사도세자’가 흐른다. 왕인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을 뒤주에 가둬 굶어 죽게 한 이야기를 노래로 만든 거라고 엄마는 말했다.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내 나이 또래의 어린 남자아이를 상상한다. 쌀을 넣어두는 곳을 뒤주라 한다는데, 나는 어둠 속에서 주린 배를 웅크린 채 울고 있는 그 아이를 떠올린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음에 이르게 할 정도의 형벌을 가할 만큼 아이가 저지른 죄가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나의 아버지가 내게 내릴 수 있는 형벌의 근거를 아무리 총동원해도 그에 닿지 못한다. 그럼에도 두려움이 인다. 나는 내 또래의 그를 생각하며 기꺼이 그 고통 속으로, 이해할 수 없는 운명의 세계로 나를 던져놓는다. 어떤 때는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억지눈물을 짜내기도 하지만, 어떤 날은 정말로 슬퍼서 몸이 몹시 무거워지기도 한다.

상상도 이해도 되지 않는 삶이라 해도, 죽음이나 이별이라는 단어가 강제하는 막막함이나 아뜩함은 내 안의 숨겨진 어딘가를 꿈틀대게 한다. 정체가 무엇이건, 속 깊은 데서 엇비슷한 감정을 끌어내어 표현함이 마땅할 것만 같다. 


한 맺힌 사연과 구슬픈 곡조의 노래를 따라 부르다 보면 나도 모르게 어른들의 마음속으로 스며드는 것 같다.


옆집 원식이네 실루엣만 남은 대추나무 이파리 사이사이로 잘 익은 감색을 닮은 석양빛이 삐져나와  내 눈으로 달려든다. 카세트에서 달각달각 소리가 난다. 테이프를 꺼내 반대편으로 돌려 집어넣고 재생 버튼을 누른다. 잠깐 뜸을 들인 듯 첫 노래가 쉬었다 재생되지만 나의 흥은 재발되지 않는다. 듣는 둥 마는 둥 내 귀와 눈은 오로지 마당 아래 원식이네를 돌아서는 골목 모퉁이에 꽂혀 있다. 아아, 저녁 어스름에 세상은 광활하게 펼쳐지고 노래 속 세상에서 빠져나온 나는 점점 작아지고, 이러다 영영 사라질 것만 같다.


아, 엄마다!


광주리를 머리에 인 엄마가 종종걸음으로 마당을 들어서며 아버지 아직 안 들어오셨는지부터 묻는다. 나는 순간 심장이 터질 듯 하지만 툇마루를 폴짝 내려서며 마당이 쩌렁하게 고함친다.

“아버지는 안주 안 들어왔고, 오빠야는 아까 아까 놀러 나갔고, 지섭이는 아이까지 자고 있다!”

박자감이 착 달라붙는 내 들뜬 목청에 초저녁 잠에서 깬 동생이 와락 울음을 터뜨린다. 엄마는 저녁밥을 해야 한다며 부엌으로 들어가다 말고 돌아선다. 그러고는 저만의 세상 속을 헤매는 기계음의 노래 줄기를 헤치고  다가가 정지 버튼을 누른다. 아, 아직 노래가 나오고 있었구나.

 

노래는 사라져도 나의 세상은 엄마가 몰고 온 소리들로 이미 가득 차 있다.


아버지 오시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며, 엄마는 내게 동생부터 얼른 달래고 오빠를 불러오라 이르고는 부엌으로 사라진다. 내 뱃속에 기분 좋은 시장기가 돈다. 문지방을 기어 나온 동생의 점점 높아지는 울음소리에도 아랑곳없이 나는 오빠가 놀고 있을 공소 마당을 향해 투스텝으로 깡종깡종 뛰어간다. 발걸음에 맞춰 어떤 노랫말이 되감기를 반복하며 흘러나와 땅거미처럼 골목으로 환하게 퍼진다.


‘노오란 샤쓰 입은 말없는 그 싸람이, 어쩐지 나는 좋아, 어쩐지 맘에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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