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반을 챙겨 닭 모이를 주러 문을 나서는데 아래 텃밭에서 일하는 남편이 보인다. 그에게 총각무 씨를 파종해야 하니 잡초로 그득한 땅에 거름 넣고 일구어 달라고 부탁했었다. 어제 밭을 일구었으니 그의 과제는 끝났을 텐데 뭘 하는 거지?
그가 일을 시작하면 나는 초조해진다.
부슬비가 막 뿌려진 터라 나는 마치 그를 걱정하는 듯(!) 외치며 텃밭을 향해 잰걸음으로 내려간다. 그는 고개도 들지 않고 텃밭 한쪽에서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다. 내 소리를 듣거나 다가가는 걸 느꼈을 텐데 그는 평소처럼 오늘도 돌아보지 않는다. 일에 집중하고 열심이니 내 기척에 반응하지 않는 것은 ‘노터치’경고이거나 경계를 드러내는 거라고, 나도 평소처럼 생각한다.
저런 때가 더 위험하다!
남편은 무거운 쇠막대로 힘주어 땅을 찔러 듬성듬성 구멍을 내고는 총각무 씨를 두어 개씩 넣고 있었다.
‘으음... 뿌리식물 씨는 저렇게 깊은 구멍을 파서 넣으면 안 될 텐데, 게다가 김장무도 아니고 총각무는 몸집이 작으니 더 촘촘히 줄지어 뿌리고, 싹이 돋아 너무 쏠리면 그때 솎아줘도 되는 건데... 저건 좀... 아닌데... 어! 저기는 올봄에 눈개승마 모종을 몇 포기 사서 심어둔 곳인데 비닐로 덮어버렸네. 거긴 손대지 말라고 했는데!’
부글부글 속엣말이 끓어오른다.
넘치기 직전이다!
‘자, 침착하자.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주워 담을 수 없는 건 포기하자. 자발적으로 내 일을 도와주려는 사람의 선의를 망쳐서는 안 돼. 참아야 하느... '
“어... 여보...(내가 입을 떼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땅만 보는 그의 옆얼굴이 굳어져 가는 게 보이지만, 그럼에도) 알타리는 그런 식으로 씨를 넣지 말고 (이미 커다란 구멍은 무정형으로 다 뚫었고 씨앗도 거의 넣은 게 보이긴 하는데), 김장무보다 작으니까 더 촘촘하게 (기껏 애쓴 사람 공을 허사로 돌릴지 모르니 여기서 그만) 뿌리고,( 내 고약한 잔소리에 제동을 걸자...) 나중에 솎아내도 되니까...”
“이 사람아. 이미 다 했는데 어쩌라고. 저 너머 긴밭도 다 이렇게 심었다고! 아, 괜찮아!”
그는 짜증을 담아 항변한다.
“아니, 여긴 땅만 갈아주면 내가 씨 뿌리겠다고 했었잖아. 심어놓은 채소나 약초들이 많아서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왜...
저기도 봄에 기껏 심어놓은 채소가 있는데 다 갈아엎었고, 여기도 파드득나물 있으니 조심하라고 했었잖아.”
“아, 당신이 여기까지 땅 갈아달라고 했잖아. 일을 해줘도 맨 날 못마땅해하니 참...”
두어 차례 더, 각자 뭉친 가시 돋은 공을 상대의 고집스러운 벽을 향해 내던진다.
둘 다 패자가 되어버린 게임을 끝내려는 듯 그가 먼저 삽과 파종 도구를 주섬주섬 챙긴다. 나도 갈피 잃고 만 갈래로 뻗어가는 마음에 휘청거리며 돌아선다.
But! 겨우 1회전 종료공이 울린 걸까.
닭장을 향해 걸으며 스치던 내 눈길이 어느 순간 허전함에 멈칫한다. 수상쩍은 예감으로 서늘해진다.
아, 포포나무가 사라졌다!
오른쪽 파란막대 뒤에 숨어있던 포포나무
작년 봄에 묘목을 심고 신경 써서 돌보던 어린 포포나무가 보이지 않는다. 내 허벅지까지 간신히 키를 돋우던 나무였는데, 눈에 잘 띄라고 앞 세워둔 새파란 쇠막대만 홀로 우뚝하다. 고작 검지만 한 키로 줄어든 채 만신창이로 찢긴 줄기 끝이 보인다. 남은 줄기로는 회생이 불가능해 보인다.
예초기 짓이 분명하다!
내 숨결이 거칠어진다. 고개를 무겁게 젓고 꼼짝 않기로 한다. 등짝의 표정만으로도 생성 직전의 1급 태풍이라는 걸 선연히 드러내고 싶다.
심상찮은 공기를 느꼈는지 철수하는 그의 발걸음 소리가 조심스럽다.
“당신... 이거 내가 얼마나 아끼던 나문데... 또 잘라버렸잖아. 우리 뭉게구름 묻은 자리에 특별히 심어 두고 너무 어려서 못 자랄까 봐 자주 돌봐주고.., 예초기에 잘려 나갈까 봐 주변 풀들도 미리 다 매어놨단 말이야. 실수하지 말라고 막대기까지 세워놨는데, 근데, 근데 왜 또...”
내 눈을 피하며 그가 천천히 입을 연다.
자신이 잘랐을 리 없다고, 조심하였노라고, 아마 근처 풀 예초하다가 돌이 튀어서 잘려나간 걸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