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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안녕 Dec 02. 2021

경계의 속사정 2

허공에 세워진 표식들


어깨에 내려앉는 보슬비가 무겁다.


집안으로 들어와 물 한 잔 마시고 쉼 호흡도 해보지만 텃밭과 그를 향해 날카롭게 서성대는 마음은 돌아오지 않는다. 되풀이되는 상황은 익숙하지만 반응하는 마음은 늘 처음처럼 요동친다.

휴일에도 밭일하는 남편을 격려하진 못할 망정, 타박과 짜증은 지나치지 않냐는 자책도 삐져나오려 하지만 고개를 젓는다.


나의 낙담과 울화에 더 집중하고 싶다.

  



지난주, 점심 설거지를 하던 중 부엌 창밖으로 예초기를 들고 마당으로 나서는 남편이 보였다. 나는 거품 묻은 접시를 그대로 둔 채 손만 대충 헹구고는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그가 예초기를 들면 내 가슴에선 '덜커덕' 소리가 난다.


예초기 본체를 짊어지고 기다란 예초봉을 장총처럼 든 남편은 자못 비장했기에 나는 더 긴장되었다. 예초작업을 시작하기에 앞서 반드시 거치는 '일러두기' 절차 때문이었다.

집터와 콘크리트 포장된 마당과 길을 제외하고라도 풀들이 자랄 수 있는 우리 땅은 200평가량 된다. 직사각 틀을 세워 만든 텃밭과 꽃과 나무가 심긴 정원이 포함되어 있지만 잡초를 잡기에 호락호락하지 않은 면적이다. 내가 사는 윗집(나와 남편은 각자의 집이 있다)의 잔디마당은 물론, 틀밭 사이 통로와 몇 단에 걸친 긴 축대, 길 가장자리, 언덕 경사지 등 까다로운 지형이어서 더더욱 각별한 주의가 필요했다.

사방팔방에 심어놓은 어린 묘목들이 자칫하면 예초날에 잘려나갈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키 큰 잡초들 틈바구니에 가까스로 자라고 있는 각종 꽃무리의 위치도 얼핏 보아서는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러니 예초 때마다 의식을 치르듯 남편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잡초 제거가 필요한 곳과 주의를 기울여야 할 곳을 일러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날도 그랬다. 몇 군데 주의사항 전달끝나기도 전에 남편은 서둘러 내 말문을 닫으려 했다.

'다 안다고, 지난번에도 거기는 피했다고, 알아서 할 수 있으니 당신은 그만 집에 들어가 있으라고... '

예초기 시동을 당장이라도 걸 태세였다. 엔진이 걸리면 기계 소음으로 내 목소리를 덧붙이기는 어려워진다. 나는 다급히 그의 움직임을 만류하며 말을 끝까지 잘 들어달라고 다시 한번 당부했다.


그의 눈길을 붙잡아서 검지 손가락을 표식 삼아 예초가 필요한 공간에 박았다.


 '저 밭은 풀밭처럼 보여도 채소들이 숨어있으니 건드리지 말고, 쪽파를 심을 거니까 이쪽은 놔두고, 저 쪽은 싹 쳐버려도 되고, 특히 저긴 과실수가 있으니까 돌이 튀지 않게 조심하고, 경계석이나 막대기가 꽂힌 곳은 절대 가까이서 돌리지 말고....'

 그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지만 미덥지 않았다. 정원과 텃밭을 손수 가꾸는 나조차 간혹 헷갈리는 지점들이 있는데, 평소 틀밭의 지도에 무심한 남편이 어떻게 다 파악했단 말인가.

이제는 들을 만큼 들었다는 완고한 표정으로 그가 엔진 시동을 걸었다. 체념과 불안을 뒤섞어 한숨을 내쉬며 나는 그에게서 멀찍이 물러났다.

  


우렁찬 엔진 소리가 마치 수만 관중이 지르는 응원의 함성이 된 듯 그는 경주마처럼 내달린다. 


그렇게 포포나무는 제거된 거다.


소파에 드러누워 눈을 감는다. 몇 달 전에도 우린 비슷한 언쟁을 했고 결과는 지금과 동일하다. 아무리 경계하고 조율해도 일 년에 두어 번은 겪는 일이다. 그는 어떤 일이든 채비하고 나서는 순간부터 성마른 사람이 되고, 나는 그와 함께 해야 하는 일 앞에서 예민하고 까탈스러워진다. 한마디로 우린 '함께 일할 수 없는 사이'이지만 '함께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 사이'이기도 해서 어떻게든, 무어라도, 경계가 필요했다. 우린 부단히 노력했고 겨우 여기까지 와있었다.

    


 누운 채 숨 고르기 하다 보니 어느새 날 서있던 경계가 창밖 풍경처럼 흐려진다.

그깟 나무 한 그루가 뭐라고...

작년 봄에 함께 심었던 다른 나무들은 제 앞가림하며 활개 치듯 뻗어갔다. 그에 비해 입이 짧고 병약한 늦둥이 막내같이, 열매 맺을 날이 오기나 할까 애면글면 돌봐야 했던 나무였다. 어쩌면 예초 날이 아니었더라도 닥쳐올 혹한에 얼어 죽거나 내년 장마에 뿌리가 썩어 제 명을 다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미 사라진 것들을 소환한들 무슨 소용일까.

  

그래, 지난주 예초가 끝난 후, 푸른 이파리들이 조각조각으로 흩어졌다 주저앉은 자리들을 둘러보다 발견한, 댕강 잘려 발목만 남은 능소화도 더 이상 떠올리지 말자.    

또 그깟 파드득나물 밭은 다 뭐라고, 올봄엔 뜯어먹을 나물들이 지천이라 몇 번 상에 올리지도 않았는데 호구에 뿌리째 들쳐져 팽개쳐졌다한들 뭐 그리 안달복달할 일인가. 살아남은 것들 씨 받아 다시 번성시키면 되고, 맛 본 적도 없는 눈개승마는 봄날 장터에서 모종 사서 또 심으면 되지. 

그래, 분명히 주의하겠다 다짐받아 뒀음에도 막상 그의 눈엔 울창한 밀림처럼 보였을, 그러니 말끔히 이발시키고 시원해했을, 그렇게 스러져갔을 도라지와 더덕 밭에 대해서도 더 이상 생각을 말자.

그깟 총각무 씨를 밭게 뿌리든 덤벙덤벙 뿌리든, 더디게라도 싹만 오르면 되지, 김장무처럼 퉁실하게 자랄지도 모르는데 괜한 참견이 아니었나.

어디 내다 팔 것도 아니고 자기 기분에 흥나 일하는 사람을 가르치려 드는 내가 별나고 못난 거지. 그도 어쩔 수 없는 일인데, 해마다 되풀이되는 지리멸렬한 이 다툼을 정말 끝내야할텐데... 그래야 할 텐데... 그럼에도...


일어나서 밖으로 나간다. 아직 비는 내리지만 일단 걷기로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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