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안녕 Dec 07. 2021

경계의 속사정 3

어긋나는  공식

걷다 보면 가라앉겠지.


접이 우산을 펼쳐 들고 집을 나선다. 길가 양쪽으로 비스듬히 펼쳐진 산밭에는 검은 비닐을 덮은 이랑들이 비를 맞으며 가지런히 누워있다. 농부의 손길을 물린 밭은 비닐을 두드리는 빗소리만 피워 올린다. 평소 산책할 때는  내 기분이야 어떻든, 밭 일중인 농부들의 낯익은 등허리를 향해 부러 더 밝은 목소리를 내어 일일이 인사를 건네야 했을 것이다. 비 덕분에 일하는 마을 사람을 마주치지 않아도 되어 한결 편안하다. 지나가는 젖은 개조차 없는 고갯길을 혼자 타박타박 걸어 오르니 곱은 기분이 시나브로 다듬어진다.

   

이윽고 뱃재 고갯마루에 닿았다. 채도가 낮아진 먼 산 능선을 눈길로 여러 번 드로잉 하며 서 있으려니 헛웃음이 새어 난다.

 

아, 왜 이리 예민한가. 휘몰아치는 대로 빨려 들지 말자. 이제 그럴 나이도 되지 않았나.


예초기를 돌리기 위해 완전군장의 꼴을 갖추고 서 있는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무릎 위까지 오는 남색 장화, 무릎 아래까지 길게 두른 예초용 앞치마, 용접 마스크를 닮은 안면보호구, 얼룩무늬 사파리 모자, 손바닥만 빨간 목장갑, 사시사철 입는 주황색 긴팔 작업 셔츠...

그렇게 등판할 차림새를 갖추고 나면 가솔린이 든 엔진 본체를 짊어지고, 손에는 회전날이 달린 기다란 예초봉을 거머쥔다. 이어 전원 끈을 힘껏 잡아당기면 굉음과 함께 예초 날이 파락 파락 세차게 돌아간다.

그때부터 잡초와의 전투가 시작된다. 

      



그에게는 다른 어떤 것도 들리지 않는다. 보이지도 않는다. 

오직 제거해야 할 대상과 지켜야 할 대상만 구별할 뿐이다.

 

긴 예초봉을 단단히 쥐고 쉴 새 없이 좌우로 휘둘러야 하니 여름철엔 온몸이 땀에 갇힌다. 남편이 쓰는 예초기 날은 플라스틱 끈으로 되어 있지만, 땅을 휘저으며 돌기 시작하면 잔돌이 폭탄의 파편처럼 사방팔방으로 튀기도 한다. 주변에 있는 모든 생명체는 그 위협으로부터 멀찍이 물러나야 한다. 그럼에도 예초하는 본인의 안경이나 유리문에 튀어 금을 내거나 깨뜨리기도 다. 의도치는 않았으나 결과적으로 선제공격한 셈이 되는 벌집 건드리기도 자칫 돌발적인 위험을 초래한다. 지형이 까다로워 비탈이나 축대를 정리할 때는 허방을 짚거나 미끄러질 수 있어 서있는 것도 위태롭다.

단단하고 두꺼운 풀줄기는 쉽게 잘리지 않는다. 환삼덩굴이나 칡 줄기, 메꽃 같은 덩굴식물에 휘감기면 엔진은 신음 소리를 내며 자동으로 꺼져버린다. 그러면 짊어진 본체를 내려 얽힌 줄기들을 제거하고 다시 줄을 당겨 재가동을 시켜야 하는 번거로움도 잦다.

잘린 풀들은 발을 덮으며 쌓여가고, 보호경은 흙먼지와 풀의 파편으로 흐릿해진다. 온몸에 들러붙는 끈끈한 땀과 점점 힘이 빠져가는 어깨와 팔...

그렇게 난이도 최상인 한 시간 여의 노동(언덕 너머의 긴 밭을 빼고라도)을 마칠 무렵엔 녹초가 될 수밖에 없다. 때때로 그의 후줄근한 어깨선이 안쓰러워 보이기도 다.


예초 작업은 작심하여 치러야 할 거사임이 분명하다.

     

사실 나는 단 한 번도 예초기를 가동해본 적이 없다. 부실한 내 몸으로 예초기를 짊어지고 막대를 휘두르는 건 엄두조차 내지 않았기에 당연하듯 남편 몫이었다.

풀들이 경쟁하듯 키를 높이고, 길이 사라지고 경계가 지워지는 여름이 다가오면 나는 초조해진다. 호미나 손으로 해결 가능한 범주를 벗어나는 어떤 특이점이 왔다고 판단되면 남편의 손을 빌려야 하는 것이다. 그의 휴무일에 맞춰 다른 일정은 없는지, 컨디션은 어떤지 눈치를 살펴야 하고, 디데이가 있는 주말 하늘의 낯빛도 체크해야 한다. 읍소라도 하는 기분이 들 때가 있어 차일피일하며 주저하게 된다.(물론 남편은 내 마음속 사정을 다 알리 없다. 그리 섬세한 편이 아니니까)

     

이처럼 어영부영하는 새 최적의 시기를 놓치기 일쑤다.     


합리적으로는 풀대가 질겨지기 전이나 씨가 맺히기 전에 깎아야 하는데, 우리는 항상 뒷북치는 상황을 자초한다. 어느새 잡초라 통칭하는, 의도로 가꾸지 않은 풀들은 우리들의 미움과 원망을 양식 삼아 제 멋대로 눈부신 성장을 한다. 맨손으로 뽑을 수 없을 만큼 뿌리의 아귀힘이 세져 어린나무나 꽃들의 영양분을 빼앗기도 하고, 넝쿨식물들은 사정없이 모든 꽃나무 줄기를 꽁꽁 옭아매기도 한다. 설혹 때맞춰 베어낸다 해도 복수라도 하듯 풀들은 더 억세고, 더 많은 잔 줄기를 뻗쳐 왕성해지니, 생명력의 끝판왕만 확인하게 된다.


그렇게 일 년에 네댓 번 날을 잡아하는 예초라도 잡초의 분별없는 성장을 우리는 느린 걸음으로 뒤쫓을 뿐이다. 꼼꼼하게 씨가 영글어버린 풀들을 예초기로 베면 도리어 자손만대 널리 널리, 길이길이 번성하라 도움 주듯 씨앗을 사방에 흩뿌려주게 되고 만다. 풀씨 요를 깔아주고 풀 담요를 덮어주는 꼴이다. 이듬해엔 한층 더 무성해진 잡초밭을 맞닥뜨리게 되는 악순환이다.

늦은 감이 있건, 마침 적절한 때를 맞췄건, 예초일 잡기에 어렵사리 합의했다 해도 마음이 썩 편치 않다. 가꾸고 살리고자 하는 초목들을 지켜내지 못했던 숱하고 숱한(내 기준에서는 그렇다!) 상실의 지난날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귀촌 후 우리 부부에게 공통의 트라우마가 생긴 건 아닐까.

   

주변 소음까지 다 휩쓸어 삼키는 굉음, 등짝을 타고 내리는 땀의 끈적한 불쾌감, 중력에 맞서는 팔과 어깨의 통증, 벌떼와의 전쟁터가 될 수 있는 위험 등등의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예초를 통해 가장 핵심적으로 남편이 성취할 수 있는(성취하리라 믿는) 감정은 ‘개운함과 뿌듯함’ 일 것이다.

드디어 전원주택스러운, 말끔하게 펼쳐진 잔디밭이 시야에 펼쳐지고, 온전히 제 자태를 드러낸 꽃과 나무를 감상할 수 있게 되고, 뱀과 모기와 온갖 벌레의 위협이 사그라진 길을 마음 놓고 다닐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내의 수고했다는, 역시 당신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라며, 고마움이 담긴 칭찬과 인정을 받는데서 오는 뿌듯함, 그것이 거사 완료 후 받는 정당한 대가라 남편은 기대할 터였다.


    



“(텃밭+정원)-잡초=개운함+뿌듯함     


이 같은 단순 공식이 먹히면 얼마나 좋을까만, 도처에 도사린 변수로 자주 깨지곤 한다.

오늘도 그날이었다.



계속...

매거진의 이전글 경계의 속사정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