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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성이 Mar 08. 2023

짧지만 사랑했다.

아마 이맘때였을 것이다. 


'대학 신입생', '대학 새내기'로 불리던 그 시절, 3월의 나는 하나의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 꿈은 '이 주먹으로 캠퍼스를 점령하겠다!', '4년 동안 전액 장학금을 면제받는 착실한 대학생활을 하겠다.'도 아닌 바로 '여자 친구를 사귀어보자.'였다.


하지만 내 바람대로 빠르고 신속하게 여자친구를 사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당시 내 인생은 영화 <쇼생크 탈출>과도 같았다. 영화 속 주인공 '팀 로빈스'이 처음 쇼생크에 왔을 때처럼 나는 혼자 산책하는 것을 즐겼고, 영화처럼 주변에는 여자가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봄의 기운을 느끼며 캠퍼스를 내 님을 찾아 정처 없이 거닐고 있는데 누군가 내게 말을 걸었다. 


"저기 혹시 신입생이세요?"


'뭐지?' 하며 돌아서는데 단정한 검은색 정장을 입은 여성 분이 미소 지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숨이 막혔지만, 이 순간 당황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신입생인데요. 재수, 삼수 안 한 스무 살입니다."


"호홋. 딱 스무 살처럼 보이는데요!"


처음이다. 초면에 '동남아에서 오신 분 아니세요?', '혹시 군대는 어디 다녀오셨어요?'가 아닌 스무 살로 봐주다니..


"싸.. 쏴아디깝.... 아니 가.. 감사합니다."


"혹시 무슨 과인지 물어봐도 돼요?"


"네. 저 **학과인데요."


"와! 정말 반갑다! 나도 **학과는 아니지만 같은 단과대를 졸업한 선배거든."


아니 우리 단과대에 이런 여신이 있었다니, 그리고 이런 여신이 누추한 내게 말을 걸어주다니 대학 입학 후 아니 인생에서 가장 달콤하고 기분 좋은 순간이었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응.. 그런데 시간 있으면 잠시 우리 잠깐 편하게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편하게 이야기하자 = 나에 대해 좀 알고 싶다 = 나한테 관심이 있다 = 너 나랑 사귈래? = 너 나랑 결혼하자! 


이것이 말로만 듣던 우연을 가장한 운명적인 '사랑의 시작!'이라 생각한 나는 용감하게 내게 다가와준 선배님의 호의를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잠시 짧은 신분조사의 과정 (고등학교, 고향 등)을 거쳐 "너 그런데 영어 공부는 준비하고 있니?"라는 질문과 함께 1학년때부터 왜 토플을 미리 준비해야 하는지, 토플의 중요성에 대해 약 10분간 설명했다. 


하지만 곧 수업시간이 다가와 나는 그녀에게 정중하게 


"제가 수업시간이 돼서 그런데.."라고 했을 때 그녀는 그럼 약속 시간을 정하고 다시 만나자고 했다.


다시 만나자 = 애프터 신청 = 나에 대해 심층적으로 알고 싶다 = 우리 오늘부터 1일 = 우리 애는 그런데 몇 명 낳을까? 나보다 연상이지만 외모는 내가 더 중후하니까 우린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거야


나의 외모를 확인하고 짧은 대화를 나눴음에도 불구하고 또 보고 싶다는 것은 "관심이 있다 = 연하남인 나랑 사귀고 싶다"라고 생각한 나는 흥분해서 수업만 끝나면 달려 나오겠다고 그녀에게 다짐했다. 


"그거 왠지 교재 팔려고 하는 속셈인 거 같다. 가지 마!"라는 질투하는 '모건 프리맨' 아니 친구의 만류가 있었지만 나는 불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수업이 끝나자마자 그녀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그곳으로 돌진했다.


그녀는 약속한 장소에 다소곳하게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내가 비지땀을 흘리고 달려갔을 때 "왔구나!" 하며 마치 기다리고 있던 남자친구가 온 것처럼 나를 반겨줬다. 한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기다려주고 웃으면서 반겨주는 그녀를 나도 모르게 포옹할 뻔했지만 처음부터 진도가 너무 빠르면 안 될 거 같아 참았다.


그리고 우리는 벤치에 앉아 그녀의 영어 공부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듣고 있었다. 그녀가 계속 말을 하지만 그녀의 말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고


"지금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예쁜 여자친구와 데이트하는 것처럼 보이겠지.." 하는 행복한 상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목마르지 않아? 누나랑 시원한 데서 음료수 마시면서 우리 더 이야기할까?"


"그럼요! 가요! 가요! 저 목말라요.. 제가 살게요!" 


그녀는 나를 이끌고 학교 밖 카페로 데려갔다. 지금 생각하니 그 카페에는 나처럼 순진하게 따라온 딱 봐도 신입생으로 보이는 풋풋한 외모의 아이들이 우리보다 서너 살 정도 나이가 들어 보이는 남자, 여자에게 무언가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었다. 


우린 카페의 가장 구석진 곳에 앉았다. 그녀의 옆에 앉고 싶었지만 첫날부터 너무 들이대면 부담을 줄 거 같아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사실 그녀의 얼굴을 정면에서 더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검은 가방에서 교재 같은 것을 꺼내 이야기를 다시 시작했다. 역시 그녀의 말을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에 대한 내 마음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용기를 내 탁자를 치고 그녀의 하얀 손을 잡으며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말했다. 


"누나! 이 교재 내가 다 살 테니까 나랑 사귀어요!"


"아아악!!! 뭐야!! 왜 이러세요!!"


"누나랑 함께 열심히 토플 공부할 테니까 나랑 만나요!! 물론 가끔 딴짓은 하겠지만.."


"아악!! 놔! 놔!!" 그녀는 마치 구렁이를 잡은 것처럼 내 손을 뿌리치려 노력하고 있었지만 나는 꽉 잡은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 소곤소곤 대화가 오가던 카페가 그녀의 비명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덩치가 있어 보이는 남자 세 명이 테이블 가까이 오더니 "뭐 하시는 겁니까!" 이러며 내 어깨를 비롯한 신체 부위를 잡았다.


"아 씨! 당사자 아니면 놓으라고! 왜 남의 연애사에 관여해!" 


사랑에 빠진 자는 용감하다! 나는 그 순간 두려움이라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사랑의 힘은 강제로 끌고 나가려는 내게 버티는 힘을 주고 있었다. 


결국 그 세 명의 남정네들에 의해 나는 카페 밖으로 끌려 나갔다. 끌려 나가며 "누나!! 우리 만나요!! 토플 교재 살게요!! 내 친구들도 모두 사라고 할게요!"를 외쳤다.


그리고 다시는 그녀를 캠퍼스에서 보지 못했고, 짧았지만 강렬했던 나의 대학 첫 연애는 그렇게 마침표를 찍었다.


순식간이었지만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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