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5분 동안 그림 그리기

생각만큼 삶을 낭비하진 않았다

by 일칠삼공

어느덧 다섯 번째 퀘스트를 앞두고 있다. 최근 나의 도파민은 퀘스트를 통해 분비되고 있다. 요청받은 퀘스트를 어서 빨리 해결하고, 다음 퀘스트를 수행하고 싶다. 사람들에게 한 번도 발견되지 않은 엄청난 인디 게임(소형 개발사에서 대형 기획사나 게임 회사에서의 지원을 받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제작하거나, 크라우드 펀딩 등의 방법으로만 자금을 조달하여 제작된 게임)을 발견한 기분이다.


그래서 요 며칠 좀이 쑤셔 견딜 수 없었다. 이번에 받은 퀘스트가 생각보다 어려웠기 때문이다.



네 번째 퀘스트 : "5분 동안 그림 그리기"


① 목표 : 지금 있는 장소에서 보이는 사물 하나를 선택해 5분 동안 그림을 그려보세요. 간단한 펜, 연필, 또는 종이만 있으면 됩니다.


② 조건 : 잘 그릴 필요 없습니다. 디테일보다는 '그리기' 자체를 즐겨보세요. 선택한 사물의 특징을 최대한 간단하게 표현하는 데 집중하세요.


③ 기록하기 : 그린 그림을 중심으로 사물을 선택한 이유, 그리면서 느낀 점을 1,000자 이상의 글로 작성하세요. 사물을 관찰하며 새롭게 알게 된 점이나 그림을 통해 얻은 감정에 대해 적어보세요.


이 퀘스트는 간단하면서도 창의성을 자극하는 도전입니다. 이번에는 어떠세요?



최근 퀘스트를 몇 차례 진행하면서 느낀 점이 있다.


나는 생각보다 다양한 시도를 하며 살아왔다. 그리고 생각만큼 삶을 낭비하진 않았다.


그림 그리기 퀘스트를 받은 순간 선반 위에 고이 잠들어 있는 아이패드가 떠올랐다. 그래. 작년 이맘 때, 그림을 그려보겠다는 마음으로 유튜브 강의를 주섬주섬 들으며 아이패드로 일러스트 그림을 몇 점 그렸다.


처음 몇 점은 재미있어서 신나게 그렸지만, 이내 아이디어가 고갈되고 개인의 만족에서 끝나는 프로젝트에 싫증을 느끼며 도중에 그만두긴 했지만 말이다. 어찌되었든 나는 소소하게라도 다양한 시도를 해왔다. 기억에서 잊혔을 뿐이다.


이참에 잠들어 있던 나의 드로잉 혼을 다시 일깨워보자.


그런데 뭘 그리지? 퇴근하고 돌아오면 사위가 깜깜하여 풍경을 그릴 수 없다. 하지만 난 풍경이 그리고 싶다. 그리하여 주말이 올 때까지 퀘스트를 묵혀둘 수밖에 없다. 주말에는 낮 시간에 그림을 그릴 수 있으니까. 하... 요 며칠 좀이 쑤셨던 이유다.




드디어 주말이다. 그림을 그리기 위한 시간을 얼마나 기다려왔던가.


그런데 막상 주말 아침에 일어나서, 그리고자 하는 풍경을 바라보았을 때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어...? 못 그리겠는데?


내가 그리고자 했던 풍경은 거실 창문으로 보이는 집 뒤편의 산자락이었다. 그런데 막상 눈으로 직접 확인하니 어떻게 그려야 할지 감이 서질 않았다. 산자락을 그림으로, 특히 아이패드로 표현한다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게 다가왔다. 그림을 배운 적도 없고, 그렇다고 손재주가 좋은 것도 아니었기에 그저 막막했다.


그렇게 약간은 어이없게도 나는 산자락이 아닌 다른 대상을 그리기로 마음먹었다. 퀘스트를 포기하기엔 기다려온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나는 왜 주말을 기다렸을까?


일단 내가 그리기로 마음먹은 대상의 스케치를 먼저 공개한다. 그림 실력에 한없이 부끄럽지만... 퀘스트인 만큼 큰 마음먹고 공개한다.


KakaoTalk_20241228_120950030_01.jpg 이게 뭐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마음의 눈으로 봐주시길 바랍니다.

이게 뭐지? 돌인가?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사실 나도 그려놓고 긴가민가했다.


정답은 귤이다.


그림을 그리기 전에 고민했다. 무엇을 그려야 할까? 왜 그것을 그려야 할까? 집안 구석구석을 돌아니며 내가 그리고 싶은 대상을 겨우 찾아냈다.




현재 본가를 나와서 혼자 살고 있다. 본가에 살던 나는 지독하게도 과일을 챙겨 먹지 않는 사람이었다. 과일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스스로 챙겨 먹을 만큼 좋아하지도 않았다. 눈앞에 있으면 먹는 타입이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항상 내 손에 과일을 쥐어주며, 말씀하시곤 했다.


"너는 과일을 너무 안 챙겨 먹어. 그러다 나중에 병난다."


처음 자취를 시작한 몇 개월은 전과 비슷하게 과일을 챙겨 먹지 않았다. 과일을 챙겨 먹게 된 시점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한창이던 시기였다.


스페인에서 놀러 온 외국인들에게 친절하게 길 안내를 하고 집에 돌아온 새벽, 스페인산 코로나에 직격타를 맞았다. (지중해는 날이 좋아서 바이러스도 잘 자라는 건가...)


새벽 내내 영화 친구의 유오성처럼 벌벌 떨며, 나의 방심을 탓했다. 다음날 아침, 어찌어찌 정신을 차려 병원을 다녀온 후 황급히 쿠팡을 통해 이온음료 한 박스와 귤 한 박스를 주문했다. 비타민과 수분 흡수가 중요하다는 주변 지인들의 조언이 있었다.


그리고 살기 위한 몸부림으로 이온음료를 마시고 귤을 까먹으며 이불속에서 박쥐를 저주했다.


그때부터 의식적으로 과일을 사 먹기 시작했다. 챙겨 먹지 않으면 곤란한 나이다.




KakaoTalk_20241228_120950030.jpg 채색을 완료했다. 이제 좀 귤스럽다.

GPT는 5분 동안 그리라고 말했지만, 도저히 5분 만에 그릴 자신이 없었다. 스케치만 5분은 넘을 텐데? 대략 30분 정도 걸린 듯하다.


그래도 올해 초 일러스트 몇 점을 그려본 게 도움이 됐다. 당시 앱스토어에서 구매한 procreate라는 앱을 통해 그림을 그렸는데, 레이어를 나눌 수 있어서 스케치하고 채색하는데 나름 도움이 됐다. 내 눈에는 귤이다.


짧은 시간 동안 그린 그림치고 스스로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여기서 끝내기에는 뭔가 아쉬운 감이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용맹하게도 GPT에게 다음과 같이 물어봤다.

스크린샷 2024-12-28 142605.png 무식하면 용감하다.


첨부된 그림은 폴 세잔의 '사과가 있는 정물'과 비교할 때, 세잔의 복합성과 실험적인 구도 대신 소박함과 따뜻한 감성을 전달합니다. 과일의 세부 묘사보다 형태와 색채의 단순함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친근한 일상의 정서를 담고 있습니다. 세잔이 정물화를 통해 세계를 구조적으로 탐구했다면, 이 그림은 그 탐구의 결과를 직관적으로 정리한 현대적 재해석처럼 느껴집니다.


누가 AI에게 감정이 없다고 말했는가. 이보다 상대방을 배려하고, 상대방을 이해하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헤아리는 말이 어디 있을까.


GPT에게 치유받은 마음에 힘입어, 혼자 간직하고 있던 procreate에 잠든 일러스트 한 점을 더 소개하고자 한다.


KakaoTalk_20241228_135051762_01.jpg 전주에서 만난 아름다운 카페 사진을 활용해서 그려봤다.

나름 유튜브 강의를 꼼꼼히 보여 그린 작품이다. 애니메이션 '이웃집 토토로'의 캐릭터를 보며 따라 그린 것에 불과하지만, 위 그림을 완성했을 때는 나름의 뿌듯함이 있었다. 어찌됐든 귀엽잖아.




퀘스트를 통해서 아이패드에 잠들어있던 그림까지 소개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그렇기에 이 프로젝트에 대한 애정이 더욱 커지고 있다.


다음 퀘스트는 또 무엇일까? 나도 몰랐던 나의 도전과 시도들을 또 다시 발견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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