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식민지 시절의 시칠리아 도시국가들
시칠리아의 도시들엔 고대 그리스 문화유적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그리스의 식민지로 시작했지만, 그리스를 넘어서는 최대의 도시를 형성하기도 했다.
그리스 침략 이전 시칠리아엔 Sicanian, Elymian(내가 방문했던 산 위 마을 Erice에 살았었음) 등의 종족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스는 건조하고 돌이 많은 지형으로 인해, 농사를 짓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리스 인구가 늘어나자 점차 서쪽 시칠리아로 이주하게 된다. 기원전 8세기부터 본격적인 이주와 침략이 시작되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볼 때 시칠리아는 비옥한 토양을 가지고 있는 지리상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였다. 고문헌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인들은 시칠리아의 많은 언덕들을 태양의 신이 돌아다닌다고 여겼다고 한다. 시칠리아 중북부 히메라에서 먼저 들어와 있던 페니키아인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본격적으로 그리스의 식민지화가 시작되었다. 토착민이었던 서부의 Sicanian 들도 모두 그리스인에게 정복되고 만다.
본격적인 고대 그리스 식민지 도시 국가 소개에 앞서, 간략하게 시칠리아 현대 대도시에 남아 있는 그리스 로마 유적을 먼저 가 보았다.
가장 먼저 방문한 도시는 에트나 화산에서 가장 가까운 대도시인 카타니아이다. 카타니아 공항을 이용하여 여행을 시작하였으므로 카타니아는 시칠리아를 가장 먼저 느끼게 해 준 도시였다.
고대 이후, 카타니아의 바로크 건축물들은 스페인 시절 이야기와 묶어서 소개할 예정이다.
카타니아 시내 중심엔 로만 그레코 양식의 폐허가 된 극장이 있다.
인상적인 모양으로 카타니아에 1~3세기에 지어졌던 로마인의 2개 극장은, 대극장과 리허설 극장인 Odeon이란 소극장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카타니아는 로마시대보다 스페인의 정복 시절 발전과 변화를 하게 되는 도시로 고대의 흔적이 다른 곳 보다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그 다음 고대 그리스 유적은 B.C.5세기에 수십만의 인구로 고대 그리스 시대 최대의 도시였던 시라쿠스이다. 시라쿠스는 기원전 734년부터 기록이 있는데, 기원전 212년 로마에 함락(제2차 포에니 전쟁의 희생물이 됨)되기까지 시칠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도시국가를 형성했다.(개론에서 이야기하였듯, 아테네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한다.) 하지만, 시라쿠스엔 고대 유적은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노르만, 스페인 왕조가 모두 강성했던 시라쿠스를 지배하고 발전시켰으므로 그들의 문화인 바로크 성당이 주요한 건축물들이다.
하지만, 시라쿠스엔 지금까지도 유명한 수학자인 아르키메데스나 극작가로 유명한 아이스킬루스가 이 곳 출신이다. 시라쿠스엔 로마인이 만든 원형극장이 있는데, 그 주변에 그리스 극장도 같이 존재하고 있어 묘한 대비가 된다.
로마인은 타원형으로 극장을 만들었는데, 그 목적도 검투사의 경기를 보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했다. 잔인한 게임을 즐긴 로마인에 비해, 그리스인들은 연극을 상연할 목적으로 극장을 만들었다. 반원형 극장을 만들어, 반원 반대쪽은 바다나 하늘을 향해 열리게 만들었다. 주로 비극이었던 연극을 해질 무렵에 보며 극의 페이소스를 극대화기 위해 그런 모양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해질 무렵 자연이 배경인 비극을 보는 고대 그리스인을 상상해 보면 로마인보다 정서적으로 안정된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상상해 본다.
이런 형태의 극장이 가장 잘 나타나는 곳이 타오르미나에 있는 세계적인 관광지, 그리스 극장이다. 반원형 극장이 바다와 하늘을 향해 가장 극적으로 열려있는 공간을 만든 셈이다.
이제 본격적인 고대 그리스 문화유적을 소개할 차례가 되었다.
내가 무려 이틀을 머무르며 꼼꼼히 보고 싶었던 그곳이 바로 Selinunte이다. 바닷가와 고고학 유적지에 모두 걸어갈 수 있는 곳에 호텔을 잡았다. 일석이조로 Selinunte 그리스 유적은 바닷가에 위치해 있어, 해변에서의 휴양과 고대 문화유적을 감상하기에 좋은 최고의 관광 휴양지이다.
하지만, 콘코르디아 신전이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아그리젠토에 비해 덜 알려져 있어 오는 관광객이 그다지 많지 않았고, 오는 사람들도 거의 이탈리아 사람들 뿐이었다. 호텔에서도 영어나 다른 외국어를 쓰는 사람을 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셀리눈테의 비극적인 역사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도시는 그리스 Megra Hyblaea에서 온 사람들에 의해 기원전 650년에 생겼다고 전해진다. 셀리눈테는 원래 강성했던 카르타고와의 동맹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원전 480년에 시라쿠스가 히메라에서 카르타고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자, 시라쿠스의 보호를 받는 동맹국으로 전략을 바꾼다. 하지만 이웃국가인 카르타고의 동맹국인 세제스타가 침략을 하고, 기원전 409년에 카르타고에게까지 도움을 요청한다. 세계사적으로 용맹하고 지혜로왔던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이 이끄는 복수심에 불타는(동맹을 저버린 대가로) 카르타고 병사들은 9일간의 셀리눈테 포위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을 학살한다. 1년 후, 시라쿠스는 셀리눈테를 다시 점령하고 회복시키려 하지만 다시 카르타고의 손에 넘어가고 만다. 이후 BC250년경에 로마인들이 들어와 이 도시를 점령한다. 그리고 주민을 마르살라로 이주시키고, 대다수의 유적과 건물을 파괴한다.
역시 다른 나라의 도움으로 세력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그나마 있던 유적들도 중세시대 큰 지진으로 거의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이 도시는 16세기까지 잊힌 도시가 되었다. 16세기 중반 도미니크 수도사가 유적을 발견하고, 그제서야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본격적인 발굴은 1823년 영국의 고고학자인 Willian Harris와 Samuel Angell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한다.
잊힌 도시로 발굴이 늦게 시작돼서 인지, 신전의 이름도 E, F, G 등으로 붙여져 있을 따름이다.
이 고고학 유적지를 관광하는 방법은 걸어서 돌아볼 수도 있지만, 3Km 이상 되는 방대한 지역을 걸어 다녀야 하여 카트가 3곳(신전과 아크로폴리스 등)을 시간 단위로 이동시켜주는 상품이 있다. 가이드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고, 카트만 태워 이동시켜주는 방식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이드를 구해 설명을 듣는 이탈리아 관광객들도 있었다. 상세한 고대사에 대한 설명을 듣는 그들이 부러울 따름이었다.
신전 중 G신전은 가장 거대한 신전으로, 그 규모가 다음날 본 잘 보존된 아그리젠토의 콘코르디아 신전에 비할게 아니었다. G신전의 하층부는 일부에 홈이 있고 다른 곳은 홈이 없는 것이 신기했는데, 그것은 기둥이 미완성이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상징이라고 한다. 총 46개의 신전 열주가 있었다고 한다. 크기도 가로 111m, 세로 53m에 달하는 거대한 신전이다. 미완성이었던 이유도 최근에 밝혀진 바로는 그리스와 페니키아의 정치적 조약 때문이었으며, 페니키아인들이 파괴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신전 G에 새겨진 비문을 학자들이 연구한 결과, 신전이며 동시에 보물을 보관하는 용도로 쓰였음을 알아냈다고 한다. 즉, 본당은 2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어, 1층은 신전의 용도, 2층은 보관용으로 쓰였다는 것이다.
그리스 시대의 신전은 신이 사는 곳으로 성직자 외 일반인은 출입이 금지되었으므로, 보물을 보관하기에 가장 적당한 장소였다는 것도 나름의 일리가 있는 것 같다.
셀리눈테 신전 외에도 이 고고학 유적지엔 지금도 발굴이 진행 중인 아크로폴리스 등 지역이 있다. 대부분 폐허로 윤곽만 남아 있을 뿐이다.
셀리눈테의 아크로폴리스에선 국가 간 교류 흔적도 발견되었는데, 북쪽 경쟁국이었던 세제스타와 싸우면서도 결혼 조약으로 조화롭게 지냈다고도 한다.
아래 사진은 아크로폴리스의 현재 모습들이다.
아크로폴리스에서 바라보는 바다 경치도 뭔가 고대인이 느꼈을 감흥을 떠올리게 해 주는 듯했다.
셀리눈테를 나오며 계속 뒤돌아보게 된다. 셀리눈테의 슬픈 역사를 미리 알고 유적을 봐서 인지 남겨진 폐허가된 유적들이 그리스 아테네에서 보았던 그리스 본토 유적과는 또 다른 감정으로 다가왔다.
이 거대한 신전들에서 웅장함이 아닌 애잔함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이제야, 시칠리아 고대 그리스 유적의 하이라이트 아그리젠토 유적을 살펴볼 차례이다.
이곳은 세계적으로 알려진 너무나 유명한 유적지여서인지, 주차장 등 입구에서부터 스케일이 달랐다. 뭔가 아주 상업적으로 체계화된 시스템이 다가왔다. 그리고, 모든 주차한 관광객들에게 꼭 선택을 하게 하는 것이다.
사실 시스템(안내원들(?))을 무시하고 그냥 내 발길 닫는 대로 가버리면 그만이지만, 처음 온 곳에서 그러긴 정말 힘들다.
설명인즉, 2Km나 되는 곳을 갔다가 다시 주차한 곳으로 돌아와야 하니, 반대편 쪽 주차장에 내려줄 테니 그곳에서 쭉 걸어 내려오면 된다는 것이었다. 일견 일리가 있는 말이라, 더운 날씨에 어쩔 수 없이 택시를 타기로 했다. 차로 5분도 안 걸리는 거리를 어린이건 상관없이 무조건 인당 5유로씩 받는다니 시칠리아 물가에 비해 바가지인 것이 너무도 확실했지만, 알고도 당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선택지가 없었다면, 그냥 돌아볼 일이지만, 논리적으로 맞는 이야기에 비싼 택시비를 지불하고 말았다. 더위를 싫어하는 어쩔 수 없는 우리 가족의 선택이었다.
셀리눈테와 달리 아그리젠토는 새롭게 발굴된 것이 아니라, 고대부터 늘 한 곳에 있어온 신전들이다. BC5세기경에 몇 년 간격으로 하나씩 하나씩 세웠다고 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압축된 기간에 거대한 여러 신전을 어떻게 세울 수 있었나 하는 것이다. 그리스의 저명한 역사학자인 헤로도토스는 그의 문헌에서 페니키아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폭군 테론은 엄청난 부와 노예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가진 부와 엄청난 수의 노예가 신전을 세우는 원동력이 된 셈이다.
아그리젠토의 시민 1명이 약 500여 명의 노예를 소유했다는 기록도 있다고 하니, 실로 그 노예의 수가 엄청났었을 것이다.
현대에 태어난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고대시대엔 전쟁에서 지면 일반인에서 바로 그 신분이 노예로 전락하니
참 힘겨운 삶을 살았을 우리 지구의 조상들이다.
신의 집을 짓기 위해 인간인 노예가 희생된다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 생각엔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도시국가는 셀리눈테와 마찬가지로 세제스타와 카르타고에 의해 끝내 멸망한다. 초기 로마를 이겼던 카르타고의 세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한니발 장군이 어떤 능력자였는지 다시 한번 느끼게 해 준 여행이었다.
한니발 장군은 알프스를 건너와 다른 이민족을 규합하여 로마를 이겼지만, 점령하지 않고 버티다 본국에 돌아갔다. 이 바람에, 로마가 다시 힘을 키우고 대 로마제국을 건설하게 된 역사의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한니발이 코끼리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은 전설을 만들어 냄으로서(실제 알프스를 넘고 끝까지 남은 코끼리는 몇 마리 안되었다고 한다.) 다른 종족이 한니발의 편에 서게 하는 전략은 지금 생각해도 정말 탁월한 것이다. 그런 정도의 능력자에게 어느 종족이 대항하고 로마의 편에 서겠는가?
로마 제국의 역사도 카르타고를 멸망시키고 그 자리(현재 튀니지)에서부터 본격적 제국의 역사가 시작된다. 이때 덤으로 딸려 로마에 종속된 곳이 바로 지금 소개하는 시칠리아 섬이다.
아그리젠토의 대표적 신전이 바로 Concordia신전이다. 보존 상채가 양호(지붕 일부까지도 온전하다.) 한 탓에 고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전 세계의 관광객을 불러들이는 (에트나 화산과 함께) 시칠리아의 대표 관광 아이콘이다. 보존이 잘된 이유는 이곳을 6세기 비잔틴 교회로 사용했기 때문에 보강공사가 되었고, 그로 인해 이후 지진에도 보존이 된 것이라고 한다. 나중에 살펴볼 노르만인의 건축 정신과 유사하다.
시칠리아를 지배했던 노르만인들도 그전 지배자인 아랍의 건물을 재활용하여 지금의 노르만-아랍 양식의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보존되게 되었다.
콘코르디아 신전은 가로 13개, 세로 6개의 도리아식 기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기둥에 20개의 홈이 파여있다. 기원전 430년에 최초로 세워졌으며, 1748년 원래 형태로 복원하고 현재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견고하게 버티고 있는 과학적 근거로는 단단한 바위 지반 아래, 부드러운 진흙층이 존재하고 있어, 지진에도 이 층이 자연적인 충격흡수 장치 역할을 한다고 한다. 현대 학자들은 고대 건축 당시 그 사실을 알고 지었을지 아닌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고 한다.
그리스 신전이 이렇게 나 많이, 잘 보존되어 있을 줄 몰랐던 시칠리아 섬.
"이곳은 그리스나 로마가 아닌 시칠리아이다."
다음엔 시칠리아에서 가장 전성기를 구가했던, 북유럽 노르만 지배 시대의 흔적을 따라가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