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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현 Jan 22. 2020

식물이 아픕니다. 또...ㅠ

아픔을 이겨내는 토끼 선인장 _백망룡과 귀면각 접목 선인장






예전에 어떤 영상에서 유명하다는 프로파일러가 범인을 추정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범인은 3-40대 또는 50대이지만 20대일 수도 있다’, ‘이 지역의 동쪽이나 남쪽에 살지만 북쪽이나 서쪽에 거주할 수도 있다’, ‘무직자이거나 직장인이지만 주부일 가능성도 있다’. 자못 진지해 보이는 그의 프로파일링 결과. 

그러나 이런 식의 추정이라면 그의 프로파일에 걸리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식물 무식자에게 식물이 아픈 원인을 찾아내는 여정은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JeonghyunLee





전문가들도 식물을 직접 보고 그 식물이 살고 있는 환경을 잘 알지 않는 이상 식물이 아픈 이유를 콕 집어 말해줄 수 없습니다. 물이 너무 많거나 적어서, 너무 춥거나 더워서, 빛이 너무 많거나 부족해서, 화분이 너무 크거나 작아서 등으로 진단하게 되는 때가 많지요. 고수들은 식물을 보면서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식물의 특성과 환경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무엇이 문제인지 예측되는 원인을 찾아내고 적절한 처방을 내리지만, 초보들은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원인과 증상이든 상관없이 일단 물을 들이부어보고 싶은 충동만 갖게 되죠. 


어떤 식물은 애초부터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과습에 약하지만 흙이 마르면 안 된다. 물을 좋아하지만 흙이 젖어있으면 안 된다. 빛이 많으면 안 되지만 빛이 없으면 죽는다.’ 어쩌라는 걸까요? 초보들에게는 빨갛지만 파란색 같은 이야기입니다. 원하는 걸 정확히 모르겠으니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른 채 사과만 하고 있는 연인의 마음이라고나 할까요. 





©JeonghyunLee






아끼고 아끼던 토끼 선인장의 한쪽 귀가 어느 날부터 점점 쪼그라들더니 누렇게 변해갈 때 저의 마음도 누렇게 타들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앗 토끼!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이 아이는 백망룡과 귀면각을 접목시킨 선인장(Cleistocactus strausii + Cereus hildmannianus)입니다. 접목 선인장의 모양은 정말 다양하지만 이렇게 완벽한 얼굴의 토끼를 만나기는 어려워요. 최고의 접목 기술과 함께 엄청난 행운도 따라주어야 합니다. 완벽한 토끼 얼굴을 가진 이 선인장과 저의 만남은 운명적이었습니다. 플로리스트 동생을 따라 간 농장의 선인장 전문점에서 수많은 선인장들 사이를 돌아다니던 중 운명처럼 제 앞에 이 토끼 얼굴이 나타났죠. 

한눈에 반했지만 꽤나 큰 사이즈 때문에 당연히 고가일 거라 생각하고 감히 가격도 물어볼 엄두를 못 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토끼 앞을 떠나지 못하는 저의 마음을 읽은 주인아저씨는 이 선인장은 어차피 기둥 선인장에 큰 상처가 나서 제 값에 팔 수가 없으니 싼 값에 가져가라고 하셨습니다. 트럭에서 옮기다가 넘어져서 기둥 한쪽이 잘려나간 것이었습니다. 망설일 필요가 없었지요. 만면에 미소를 띠고 계산을 하는데 뒤늦게 소식을 들은 주인아주머니는 ‘이렇게 가져가면 안 되는데.. 그냥 내가 키우려고 했는데…’ 하며 섭섭해하셨습니다. 저는 짐짓 못 들은 척하면서 이쁘게 키우겠다고 약속드렸지요. 귀여운 얼굴보다도 선인장의 몸에 있는 상처를 쓰다듬으며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이 상처를 입고 잘 견뎌내지 못했다면 제 품에 올 수 없었을 테니까요. 


그렇게 만난 아이가 저희 집에 와서 아파진 것입니다. 





©JeonghyunLee






원인이 무엇일까 인터넷도 책도 열심히 찾아보았지만, 무식한 저에게는 모두 가짜 유명 프로파일러의 추측 같은 이야기로 들릴 뿐이었습니다. 물을 주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찬바람이 필요하다는 건지 더 따뜻한 곳으로 옮기라는 얘기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가고 토끼 귀는 속절없이 더 작아졌지요. 이럴 땐 정말 식물 병원이 있었으면 합니다.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가 원인과 처방을 찾아내는 결정적 증거이기 때문에 동물행동 전문가가 문제견의 집에 찾아가 주인의 생활을 점검하듯 기왕이면 식물 전문가가 저희 집으로 와 저의 문제행동을 판단하고 처방을 내려준다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JeonghyunLee






그런 전문가를 집으로 모시지 못한 채 속만 태우던 어느 날 작아진 귀의 아래쪽으로 새로운 가시들이 털처럼 도톰하게 올라오는 게 보였습니다. 선인장이 쪼그라드는 판국에 털이 풍성해지는 게 이상했습니다. 하지만 통통해진 털의 색이 눈처럼 하얘서 어쩐지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긴장 속의 며칠이 지난 뒤 볼록한 작은 털 더미 속을 보니 맑은 초록색의 선인장 몸체가 보였습니다. 털 더미의 정체는 새로운 선인장 새끼였던 것입니다. 노랗게 쪼그라든 선인장은 마지막 기운을 다 모아 새로운 선인장을 만든 듯했습니다. 또는 기운 좋은 새끼 선인장이 원래 선인장의 기운을 다 빼앗아 버린 것일 수도 있지요. 자세한 속 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접목 선인장이기 때문에 더 이상의 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선인장에게서 이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말할 수 없이 고마왔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무엇보다도 식물이 살아있고 활동하고 있다는 증거니까요. 




©JeonghyunLee






현재 저의 토끼 선인장은 멀쩡한 귀 한쪽과 노랗고 작아진 귀 한쪽 그리고 그 앞에 손톱만큼 작고 털이 풍성한 새끼 선인장을 머리에 달고 있습니다. 귀가 세 개인 토끼는 없으니 더 이상 토끼 선인장이라고 부르기는 힘들겠지요. 완벽한 토끼 얼굴은 사라졌지만 한쪽 귀와 함께 영영 떠나버리는 게 아닐까 걱정했던 선인장이 이렇게 살아 주어서 저는 감사할 뿐입니다. 겨울이 오면서 새끼 선인장은 더 이상 자라지 않고 있지만 봄이 오면 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아기들이 열감기를 한참 앓고 나면 쑥 자라는 것처럼 제 선인장도 아픔을 겪고 또 하나의 변화를 맞이했습니다. 새끼 선인장이 달려있는 쪽을 햇빛 쪽으로 조금 더 가까이 돌려주는 것 말고 저는 달리 할 일이 없습니다. 그마저도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아픈 것이 아픈 걸로만 끝나지는 않아 다행입니다. 하지만, 언제든지 생길 수 있는 식물의 아픔에 대해서는 여전히 좀처럼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습니다. 





©JeonghyunLee







<백망룡과 귀면각 접목 선인장 키우기>


빛 : 밝은 빛을 충분히 받게 해 주세요. 보통 집안에서 햇빛이 가장 오랫동안 환하게 드는 곳에 두시면 좋아요. 빛을 골고루 받을 수 있도록 주기적으로 화분을 돌려주시면 좋습니다.


물 : 속흙까지 마르면 충분히 물을 주세요. 물을 주고 난 후에는 바람이 잘 통하고 빛이 잘 들어오는 곳에 놔주시고 물이 잘 빠지는지 확인해 주세요. 키가 큰 선인장들은 선인장 주변으로 골고루 살살 물을 뿌려주시는 게 좋습니다. 장마철과 겨울에는 거의 안 주는 게 안전해요.


온도 : 겨울에도 15도 이상으로 따뜻하게 해 주세요. 보통의 실내 온도면 좋아요.






©JeonghyunLee






제가 찍는 식물 사진과 사진으로 만든 포스터는 이곳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https://www.instagram.com/40plants/


제가 찍는 다른 사진들은 이 곳에서 보실 수 있어요.

https://www.instagram.com/jhl.ph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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