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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ra Mar 16. 2018

이사를 앞두고

 노력해도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은 영역에 집이 있다


  한걸음에 부엌과 화장실, 현관문이 닿는 집에서 육년을 살았다. (육년간 같은 집에 산 것은 아니었다. 여섯 번? 그보다 더 많이 옮겼던 것도 같다) 가끔 주말에 부모님이 사시는 집에 가면 거실과 방이 분리된 낯선 느낌에 어깨가 으슬으슬 떨렸다. 내가 방이 아닌 '집'을 마련하려면 대체 얼마나 돈을 벌어야하는지 가늠이 가지 않아 멍해졌다. 


  기숙사, 원룸, 쉐어하우스, 혼자도 살았다가 둘도 살았다가 셋도 살았다가 8명도 살았다가... 무수히 많은 밤을 내 집인듯 내 집아닌 내 집같은 집에서 보내며 나는 눈만 뜨면 밖으로 나오는 생활을 했다. 학보사 안 쪽의 구석진 방에서 공부를 했고 동아리방에서 노트북으로 보는 드라마는 완죤 꿀잼이었다. 사실 대부분 학교 근처 카페를 전전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고보니 도서관은 정말로 기억에 없다....OTL)


  좁은 원룸이 답답했다 머리맡에 신발로 꽉 찬 현관이 위치한게 싫었고 1인용 침대에 둘이 딱 붙어 자고나면 목이 욱신거리는 것도 싫었다. 창문너머 겹겹이 위치한 원룸들때문에 해가 들지않아 빨래에 물냄새 나는 것도 너무너무 싫었다.




  부모세대와는 또다른 절망인걸까.


  노력해도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은 영역에 집이 있었다. 이사를 많이 다녔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싫어서 '우리동네' 가 갖고 싶었다. 아침에 빵 사면서 빵집아줌마와 인사하고 점심에는 옆집 친구와 반찬 나눠먹으며 생존신고를 하고 저녁에는 동네조깅하다 아랫집아저씨 만나 반갑구먼! 인사할 수 있는...


응팔 속 쌍문동은 나의 로망. 혜리의 반갑구먼은 동네이웃과의 편안한 관계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다.



  그런 일상이 내 로망이었다. 물론 그 안에 내 일과 내 집이 있다는 전제가 붙어야겠지만.. 어쩌다 이 곳으로 흘러와서 어쩌다 대구에 출생이래 가장 오래 살아버려서. 행복한 기억과 정체모를 고민을 갖고 나는 또다시 옮길 준비를 한다.


  원룸계약이 끝나 이사한다는 얘기를 너무 길게 했다. 보증금 300에 40짜리 집에서 1년을 살았다.  내 칭얼거림을 듣고 서울에서 사는 친구들은 코웃음을 쳤다. 겨우 그걸로 힘든 소리냐 한 친구가 말했다. 나는 이상한 부심을 부린다며 친구 얼굴을 보고 웃었다. 어쩐지 웃음 뒤에 숨은 그 친구의 큰소리가 마음아팠다.


  어쨌든 이번 집은 살았던 원룸 중 가장 넓고 비쌌다. 그래서 그런가... 이 집에서 나는 졸업을 했고 잠깐이지만 서울유학도 다녀왔으며 6년 만에 전신거울도 마련했다. 집의 기운이 나쁘지 않았다. 5년째 동거 중인 룸메이트는 방금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냉장고에서 소리가 나지않아? 냉장고 바로 앞에 이불을 깔고 자는 그녀는 이 말을 하고 3초만에 잠이 들었다.




  어찌어찌 흘러온 인생은 앞으로도 길이 나는 곳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갈 예정이다. 나에게 집도 그렇겠지. 발길 닿는 곳에 내 한 몸 뉘일 공간을 빌려 머물 것이다. 인턴 당시 이런 얘기를 했더니 팀장님은 오바한다고 농담처럼 내 포장된 처량함을 구박했다. 세 박스면 정리될 짐이니 그닥 대단한 집도 필요없지만 소박한 소원이 있다면 다음 집에는 자는 공간과 생활공간이 분리가 됐으면.. 모든 움직임을 누워서 하는게 습관이 되어 부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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