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하달하 May 30. 2019

비자를 연장하며 살아가는 삶은 말이죠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 된 기분이랄까요

외국에 산다는 것은 생각보다 복잡한 일이다. 짐을 꾸려 비행기를 탄다고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법적으로 그 나라에 머무를 수 있는 권리를 얻어야, 비로소 마음을 놓고 ‘산다’는 말을 할 수가 있다. 내게 그 첫 시작은 워킹 홀리데이 비자였다. 아주 강한 의지를 담아 ‘그래, 떠나보는 거야’하고 마음을 먹기는 했지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다시 돌아올만한 명분을 만들고 싶었다. 워킹 홀리데이는 1년짜리 비자였으니, 그동안 독일에서 생활을 해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 돌아갈 생각이었다. 더불어 서른 살이 넘으면 가질 수 없는 비자이니, 나의 마지막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욕심도 있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하고 나니 ‘돌아갈 핑계’보다 ‘살아갈 궁리’를 찾느라 바쁜 나날들이 시작되었다. 대학원 지원도 해보고 이런저런 회사에 이력서도 내며 한 두 달이 훌쩍 흘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취직을 했고, 회사 계약서와 함께 블루카드(Blau Karte)라는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사실 독일인과 약혼을 하고 곧 결혼을 앞두고 있던 나는, 굳이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배우자로서 비자를 받을 수 있는 조건을 충족하고 있었다.


‘내가 이 나라에 사는 이유가 당신 만이 아니었으면 좋겠어.’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자신감이었지만, 가능한 한 이 나라에 머무를 수 있는 권리는 나 스스로 얻고 싶었다. 그래야 이 사람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나에 대한 자존감을 지키는 데에 있어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블루카드를 받고 두 해가 지나갈 때 즈음, 나는 독일어 시험을 통과함으로써 영주권을 얻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되었다. 드디어 이 시한부 인생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순간이 온 것이다. 나는 들뜬 마음으로 서류를 준비해 외국인청으로 나섰다.




관청 안 대기실은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나고자 독일 주변 국가에서 들어온 이민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나 또한 그들과 같이 이 나라에 살 수 있는 허락을 받으러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지만, 그들보다 간절하지 않다는 이유로 나도 모르게 속으로는 우쭐한 마음이 샘솟았다.


'우쭐대지 마, 넌 그냥 그들보다 운이 좋을 뿐이니까.’


나는 남몰래 거만했던 나 자신을 혼내며, 혼잣말을 되뇌었다. 그 순간 비자 담당자의 사무실 안에서 끊임없는 실랑이가 소리가 들려왔다. 제발 여기 머무르게 해 달라는 서툰 독일어의 아저씨와 단호한 담당자의 목소리. 일자리를 잃어 비자가 소멸되었다는 아저씨의 사연에, 담당자는 '법은 법이니 직장을 구하거나 독일을 떠나라'는 똑같은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가족이 있어 꼭 이곳에 남아야 한다는 아저씨의 간절한 목소리는, 그저 공허한 울림처럼 방문 너머로 퍼져나갈 뿐이었다. 터덜터덜 방 문을 열고 나온 아저씨의 뒤로, 담당자는 내 이름을 호명했다.


‘블루카드 소지자고, 독일어 시험도 통과했고, 서류도 다 준비되었네요. 곧 영주권이 나올 거예요.’


앞의 아저씨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대화가 오갔고, 나는 가벼운 미소로 인사를 건넨 후 방을 나가려 했다.


‘잠깐, 그런데 지금 휴직 중이세요?’


육아휴가 중에 있던 나는, ‘네.’하고 대답했다.


‘현재 가져오신 계약서에 나와있는 연봉의 전액을 받는 것이 아니니, 영주권을 드릴 수 없습니다.’


분명 법적 문서에 나와있는 요건은 '독일어 능력을 갖춘, 21개월 이상 세금을 낸 자’라고 되어있었는데, 내가 아기가 생겨 육아휴직을 가진 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 나라에서 태어나지도 않고 공짜 교육을 받은 적도 없는 내가 2년간 월급의 절반에 육박하는 세금을 꼬박꼬박 내가며 일했는데, 왜 나에게 영주권을 줄 수 없다는 것인가. 독일 정부에서 운영하는 핫라인에 확인하여 ‘육아휴직은 영주권 발급과 관계없음’이라는 답변을 받았지만, 결국 마지막 결정은 해당 지역 행정관의 소관이라는 말에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억울하지만 나는 외국인이고, 이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고서는 이 나라에 살 수 없기에 그저 잠자코 수긍하기로 했다.




떤 이유에서든, 비자를 받기 위해 바리바리 서류를 준비하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관공서를 들리는 일은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다. 항상 초대받지 못한 파티에서 ‘ 나 좀 들여보내 주면 안 돼?’하고 파티장 문 앞을 서성이는 기분이 든다. 복직을 하고 영주권이 나오고 나면, 이 지긋지긋한 비자 전쟁도 막을 내리겠지만, 이 곳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내 정체성에 대해 고민이 많아진다.  해가 더 지나고 나면 시민권을 가질 수 있는 자격도 생기겠지만, 지금의 나는 앞으로도 여기서 외국인인 채로 남아있을 생각이다. 다시 말하자면, 상황이 허락하는 한 계속 한국인으로 살아가고 싶다. 엄청난 애국심에서 나온 결정이라기보다, 외국인으로서 자신감을 잃지 않기 위한 나만의 방어막을 남겨두고자 하는 마음이 더 큰 것 같다. 이 곳에서 나고 자라지 않은 이상 어차피 나는 평생 이방인인데, 굳이 내 여권까지 바꿔가며 한국인임을 포기하고 싶지가 않다. 비록 유럽 출장 때마다 ‘비유럽인(Non-EU)’ 줄에 서서 유럽 친구들보다 한참을 더 기다려야 하는 불편함은 따르지만, 그럼에도 나는 한국에서라도 온전히 자국인으로서의 안락함을 누리며 살아가고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