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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하달하 Jun 06. 2019

저는 이역만리에 사는 불효자입니다

이 끝이 보이지 않는 불효를 어찌해야 할까요

나는 설날과 추석, 일 년에 두 번 한국으로 간다. 착한 남편 덕분에 유명한 휴가지 대신, 1년 동안 쓸 수 있는 휴가를 모두 끌어 모아 대부분의 시간을 한국에서 보낸다. 부모님은 시집간 딸이 남편까지 데리고 꼬박꼬박 명절을 쇠러 오니, 외국인 사위 둔 덕에 명절마다 눈치 안 보고 딸을 마음껏 볼 수 있다며 좋아하신다. 가끔 비행기 삯도 비싼데 너무 자주 오지 말라고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실 때면, 나는 ‘이러려고 돈 버는 거예요.’하면서 가벼이 웃어넘긴다.




"은지야, 아빠 중환자실에 계셔."


지난겨울, 독일에서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가신 부모님께로부터 며칠 만에 연락이 왔다. 평소 술이 좀 과하신 아버지 몸에 탈이 났단다. 원래 여기저기가 편찮으신 것은 알고 있었지만, ‘중환자실’이라는 단어에 심장이 툭 하고 떨어졌다. 혹 '독일에 왔다 가신 게 무리가 아니었을까'하고 걱정했지만, 어머니는 그것과는 상관이 없다며 거듭 나를 안심시키셨다. 계속 드시던 술 때문에 간과 신장에 무리가 됐었는데, 독일 다녀오신 이후로 유독 심하게 술을 드셨고 추운 날씨에 독감까지 겹쳐 병원으로 가게 되셨단다. 검사를 해보니 간 수치가 위험 수위까지 올라간 데다, 신장은 거의 제 기능을 잃은 상태였다고 한다.


대학시절, 바쁘다며 연락을 피하시던 엄마가 안면마비로 병원에 다니고 계셨다는 소리를 뒤늦게서야 들은 적이 있다. 엄마가 절대 오빠와 내게 알리지 말라며 아빠에게 단단히 당부하셨단다. 굳이 멀리서 고생하는데 괜한 걱정시켜 무엇하냐고. 서울에서 포항까지 가는 게 뭐가 그리 힘들다고, 엄마는 우리가 걱정조차 못하게 자신이 아픈 사실까지 숨기셨을까. 그 거리보다 스무 배는 먼 거리에 사는 딸에게 아빠의 소식을 알리기까지 엄마의 마음은 또 어떠했을까. 아빠가 입원하신 지 하루가 지나서야 연락을 들은 나는 안절부절 어찌할 바를 모르고 전화를 끊었다.


하염없이 눈물만 흘렀다. 중환자실에 누워계실 아버지의 얼굴과 함께, 독일에서 지내시는 동안 술도 끊고 담배도 끊으시라 사사건건 잔소리만 하던 내 모습이 겹쳐 떠올랐다. 이것이 아빠와의 마지막 기억이라면,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독일에서 번 돈을 모아 용돈을 드리고, 독일로 오가는 비행기표를 사드린다고 효도가 아닌데, 어쩌면 나는 내가 하고 있는 아주 작은 행동들로 나의 불효를 숨겨보려 했던 것은 아닐까. 지금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의식 없이 누워있는 아빠의 옆을 지키고, 아빠 때문에 잠 못 이룰 엄마를 품에 안아 드리는 것인데,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소파에 앉아 눈물을 쏟아 내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행히 아빠의 상태는 빠르게 호전이 되었고, 한 달 후 설날을 맞아 찾아간 한국에서 다시 만난 아빠는 이전보다 더 건강한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고작 한 달 술 담배를 안 했을 뿐인데, 아버지는 10년은 젊어진 얼굴로, 언제 아팠냐는 듯 우리 가족의 애간장을 녹였다 얼렸다 하며 천진난만한 표정을 하고 계셨다. 하지만 나는 이번 일로 언제가 이런 소식을 다시 접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 순간을 상상하면 얼른 짐을 싸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가도, 어릴 적 어머니께서 해주셨던 이야기를 떠올린다.


"엄마는 오빠랑 나랑 다 멀리 있으니, 보고 싶지 않아?"


오랜만에 고향집을 찾은 내가 엄마에게 물었다.


"당연히 보고 싶지. 주변에 자식이랑 가까이 사는 친구들 보면 엄마도 부럽지."


엄마가 말했다.


"그런데 엄마는 너랑 오빠가 집에서 멀리 살아 다행이라고 생각해. 엄마 아빠 걱정은 다 잊어버리고, 너희가 하고 싶은 것 하며 자유롭게 살았으면 했거든. 자유롭고 행복하게."


우리가 멀리 살아 다행이라면서도, 엄마는 하루에도 몇 번씩 '보내기를 잘했다'는 마음과 '보고 싶다'는 마음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셨다. 엄마 말대로 행복하게 살려고 이 먼 곳까지 날아온 나지만, 그때의 엄마처럼 '오기를 잘했다'는 마음과 '보고 싶다'는 마음이 쉴 새 없이 오가는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보고 싶다'는 말보다 '죄송하다'는 말이 더욱 정확할 것이다. 나는 그때의 엄마가 상상도 못 하셨을 만큼 멀리 떠나와 있지만, 적어도 엄마가 원하던 대로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가끔 어머니의 저 말씀이 나와 오빠의 마음을 편하게 하려는 하얀 거짓말은 아닐까 의심을 하긴 하지만, 앞으로도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작고 이기적인 효도를 계속 이어나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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