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뤼셀의 교통 체증이 싫지 않은 이유
금요일 저녁 8시 30분, 출장을 마치고 브뤼셀 기차역에 도착했다. 트렁크에 짐을 싣고, 언제나 그렇듯 악동뮤지션의 착한 노래를 들으며 집으로 향했다. 독일 쿄른역에서 5시 반에 출발하기로 했던 기차가 지연되고, 그 사이 고객사 중역 미팅에 참여하느라 이어폰을 꽂고 신경을 쏟느며 저녁은 먹을 생각도 못했지만, 그래도 드디어 집에 간다는 생각에 슬며시 미소가 올라왔다.
내가 사는 벨기에는 이제 코로나의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모든 생활이 자유로워졌다. 입사 처음 집에만 있던 날들과 달리, 요즘은 적어도 일주일에 두 번 즈음은 회사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선다. 브뤼셀의 명물 오줌싸개 동상과 그랑 플라스가 있는 알짜배기 지역으로 출근을 하려면 아침 7시 반에 집을 나와 한 시간정도 운전을 해야 하지만, 악명 높은 브뤼셀 운전이 아무렇지 않게 느껴질 정도로 나는 차 안에 있는 시간이 너무 좋다. 아이들과 남편이 깨지 않게 조심조심 출근 준비를 하고, 이든이 간식 상자와 점심 도시락을 준비해 놓은 다음, 신선한 아침 공기를 맡으면, 작은 뿌듯함과 함께 오늘은 왠지 행복한 하루가 될 것 같은 소박한 희망이 샘솟는다.
하루 종일 영어로 일을 하고 있지만, 언제나 부족한 마음에 유튜브 영어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며 움직였다 섰다를 반복하는 다소 재미없는 운전을 이어간다. 머릿속으로는 빽빽한 회의 일정을 되뇌며 오늘 해야 할 일을 가상의 노트에 적어 내려간다. 두 번의 출산 탓인지, 아니면 그저 내 나이가 들어가서 그런 건지, '이 중에 반은 금세 잊어버리겠지'하는 생각에 살짝 허무해질 때도 있지만, 그래도 열심히 머릿속으로 부지런을 떨어본다. 회사까지 10분 정도 남았다 싶으면 얼른 가톨릭 아침 기도를 검색해 틀고는, 오늘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바른 길로 향할 수 있기를 조용히 바래본다.
퇴근길은 언제나 마음이 바쁘다. 후다닥 미팅을 마무리하고 나서, 저녁 준비는 못하더라도 애들이랑 같이 밥 먹는 시간이라도 맞출 수 있도록 화장실 가고 싶은 마음도 참고 바로 주차장으로 뛰어간다. 자동차에 올라타 내 마음에 드는 음악을 틀고 열심히 집으로 향하면, 마음은 급하지만, 고단한 하루를 산 나에게 선물을 주는 시간인 것 같아 꽉꽉 막히는 도로가 마냥 밉지는 않다.
오늘도 그런 날이었다. 이틀이나 못 본 아이들도 보고 싶고 나 없는 동안 고생했을 남편 생각도 나고, 머릿속을 짓누르던 일들도 다 잘 해결이 되었고, 내가 좋아하는 노래도 실컷 들을 수 있는 이 익숙한 공간을 기분 좋게 즐기고 있었다. 복잡한 브뤼셀을 빠져나와 한적한 도로를 지나고 있을 때, 하늘에서 굵은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참, 비가 온다고 했지, 차 안에 있어 다행이다' 싶다가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무거운 빗방울 소리만큼이나 내 울음소리도 점점 커져 갔다. '엉엉엉, 으아아아앙' 이렇게 큰 소리로 울어본 게 언제였나 싶을 정도로 내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때마침 나온 '밤 끝없는 밤'이라는 노래가 나를 위로해주는 느낌이 들어서였을까. 갑자기 온몸의 긴장이 풀리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1 그램의 무게도 없이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 집으로 갈 수는 없을 것 같아, 집 앞 주차장에 차를 대어 놓고, 휴지를 꺼내 코까지 풀어가며 원 없이 소리를 내며 울었다. 딱히 슬플 일이 하나도 없는, 작은 실수 하나 없이 모든 것이 너무나도 완벽했던 그런 날, 비가 와서, 노래가 좋아서, 그냥 차 안에 혼자 있는 내가, 온몸이 아파올 정도로 잔뜩 긴장하며 일주일을 보낸 내가 가엽고 대견해서, 그냥 그렇게 비가 그칠 때까지 엉엉 울었다. 우렁찬 빗소리만큼이나 시원하게 울고 나니, 이틀 만에 처음으로 허기가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