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에서 난 용이 행복하기 힘든 이유
번아웃 치료를 시작한 지 반년이 넘게 지나가는데도 크게 차도가 보이지 않는다. 초반 3개월 정도는 매일매일 에너지가 조금씩 생겨나는 기분이었는데, 그 이후로는 정체되거나 오히려 퇴보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사이먼과의 상담 시간도 점점 숙제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상담을 한다고 정말 나을 수 있을까? 평생 이렇게 우울한 채로 살아야 되는 거 아니야?’
상담을 가는 내내 이런 생각들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이렇게 오랫동안 아무 일도 안 하면서, 돈을 받고 있는 게 죄를 짓는 기분이에요. “
사이먼은 그것을 ‘보험’이라 부른다며, 내가 나쁜 짓을 해서 돈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이제껏 열심히 일해서 지금과 같은 상황에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보험이라는 제도를 이용한 것이라 말했다.
“그래도 저희 부모님은 평생 열심히 일해도 가지기 어려웠던 돈을, 저는 가만히 앉아서 보험금으로 받고 있다는 게 마음을 무겁게 해요.”
그렇다. 나에게 일을 하지 않고 돈을 받는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팔다리가 부러진 것도 아니고, 사지가 멀쩡히 움직이는데 일을 못하겠다고 집에 머무르고 있는 이 상황이, 심지어 여러 보험사에서 경제적 지원을 받고 있는 이런 상황이, 나는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이런 나에게 사이먼이 깜짝 지령을 내렸다.
“그럼 지금 나랑 이야기하는 동안, 일어서서 다리 한쪽을 들고 서 있어 보세요. 도저히 힘이 들어 안 되겠다 싶을 때까지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죠.”
무슨 상황인가 싶어 어리둥절했지만, 나는 사이먼이 시키는 대로 한쪽 다리를 들고 서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우스꽝스러운 자세에 창피하기도 했지만, 금세 다리가 무겁게 느껴져 뒤뚱하며 주저앉아버렸다. 그런 나를 보던 사이먼이 말했다.
“지금 무슨 생각이 들어요?”
“조금 바보 같다 생각했어요. 내가 왜 이렇게 우스꽝스럽게 서 있어야 되나 싶어서요.”
“맞아요. 지금 은지 씨가 죄책감을 느끼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아주 쓰잘 때기 없는 생각이죠.”
사이먼이 이것이 행동치료 중 하나의 예라고 했다. 내게 아무 쓸모없는 행동을 시켜서, 내 머릿속의 생각 또한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깨닫게 해 주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상담이 끝나고, 오늘 했던 이야기들을 짧게 정리한 사이먼의 문자가 도착했다.
“… 제발 그 죄책감을 버려요. 아마도 은지 씨가 자라온 문화나 환경 때문에 죄책감을 안고 있는 것 같은데, 이런 무거운 감정은 치료에 아무런 도움이 안 돼요. 지금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있는 에너지를 찾는 거예요. … (…Please do not feel guilty. Guilt is a heavy emotion that is often shaped by culture, but it doesn’t help you heal. Your priority now is to recharge so you can put your energy into something creative and fulfilling for you. …)”
나도 아는데, 이런 죄책감 따위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것을 아는데, 번아웃으로 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 죄책감의 무게는 더욱 무거워져만 갔다. 일은 하지 않으면서 머릿수만 채우고 있는 상황 때문에 회사에 미안하고, 집에 있으면서 우울감에 젖어 항상 뚱한 표정으로 있는 것에 가족들에게 미안하고. 빨리 낫고 싶은데, 좀처럼 차도가 보이지 않는 나 자신에 답답함과 짜증이 몰려왔다.
사실 이 이유 없는 죄책감은 번아웃이 오기 아주 오래전부터 나를 따라다녔다. 서울 강남 삼성동의 번쩍번쩍한 빌딩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그 순간부터, 나는 알 수 없는 괴리감을 느꼈다. 어릴 적 내 친구들과는 다르게 재래식 화장실을 사용해야만 했던 나, 주말도 휴가도 없이 매일 고단한 몸을 일으켜 중국집 문을 열던 부모님, 내가 회사원이 되고서도 부모님은 텅 빈 가게들이 즐비한 도로변에 시끄러운 그 건물을 벗어나지 못하고 사셨다. 삼성동 어드메 고요한 주거단지 속 안락한 원룸에 살고 있던 나는, 나 홀로 쾌적한 삶을 누리는 것이 못내 죄송했다. 내가 어마어마한 성공을 이룬 개천의 용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태어난 개천을 벗어나 강도 보고 바다도 보고 살며, 언젠가는 부모님도 나처럼 편안한 삶을 살게 해 드리리라 마음먹었다. 벨기에에서 상담을 받을 때마다 ‘한국은 경쟁사회지요,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힘들었을 테죠.’라며 의사나 상담사가 본인이 익숙히 들었던 아시아, 한국의 상황을 빗대어 이야기했지만, 사실 우리 부모님은 한 번도 내게 그런 부담을 준 적이 없었다. 이것은 순전히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숙제이자 내가 스스로 짊어진 짐인 것이다. 결국 나는 부모님의 환경을 바꿔드리고 이제는 힘들게 일하시지 않아도 되는 삶을 선물해 드렸지만, 이 죄책감은 나를 떠나지를 않았다. 점점 더 나은 삶을 살게 될수록, 행복함보다는 이 원인 모를 죄책감만이 더 짙어져 갔다.
내가 일을 쉬게 된 후로, 나는 평소에 자주 만나지 못했던 동네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아일랜드 출신에, 이든이와 동갑인 아들 하나를 키우고 있는 제니는 나의 수요일을 책임져주던 아주 고마운 친구이다. 이든이 친구 엄마들과 이탈리아 여행을 갈 정도로 친하게 지내던 나지만, 야근에 출장에, 몇 주 전에 날을 잡지 않으면 차 한 잔 같이 마시기가 힘들었다. 사실 내가 번아웃이 왔다는 얘기를 할 때부터, 동네 친구들은 ‘이제야 그걸 알아챘니? 우리는 다 그럴 줄 알았어.’라며 나를 측은히 바라봤었다. 그중에서도 제니는 특히나 나를 더 안쓰럽게 여겼다. 학교에서 나를 마주칠 때도 인사를 건네기가 미안할 만큼 숨 쉴 틈이 없어 보였다고 했다. 제니는 그런 내가 회사를 안 나가게 되니 드디어 나와 마주 앉아 브런치를 즐길 시간이 생겼다며 반가워했었다. 제니는 언제든 집으로 놀러오라며, 갑작스레 텅 빈 하루를 맞이한 나를 초대해주었고, 나는 일주일 중 그나마 에너지가 가장 높았던 수요일을 골라 제니를 만나러 갔다.
“뭐 먹고 싶어? 말만 해. 내가 다 해줄게. 맛있게 먹고, 저기 소파에 앉아 넷플릭스나 보다 가.”
제니는 내게 ‘번아웃이라며? 요즘은 어떻게 지내?’ 등의 식상한 질문 대신, 그냥 평범한 하루를 보내는 법을 알려줬다. 평소 스릴러 범죄 스토리를 즐겨 보던 제니는, 내가 갈 때마다 새로운 볼거리를 알려줬다. 제니가 차려주는 달달하고 따뜻한 아일랜드식 브런치 메뉴와는 어울리지 않는 터라 다른 것을 보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나는 그냥 잠자코 제니네 소파에 앉아 몇 시간이고 제니가 틀어주는 스릴러물을 보다 집에 왔다. 그다음 주 수요일도, 그 그다음 주 수요일도, 아이들을 학교로 보내고 나면 터덜터덜 제니네 집으로 가, 주방 한 구석에 있는 의자에 앉아 제니가 요리하는 것을 바라보다, 따끈한 브런치를 먹고 난 후, 소파에 앉아 티브이를 보다 집에 왔다. 그러던 어느 날, 제니가 준비해 둔 포근한 담요를 덮고 잠이든 나. 강아지들이 움직이는 소리에 눈을 뜨니 제니가 옆에 앉아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어떤 이야기 때문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갑자기 눈물이 팡 터져 나왔다. 나는 아무 일도 안 하고 가만히 앉아 있는 내가 죄를 짓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좋은 환경에서 일하고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는데, 이것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것 자체가 죄스럽다고 했다.
“왜 꼭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 일을 하지 않는 너도 너야. 지금 네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은, 그냥 주어진 게 아니라 네가 이제껏 열심히 노력한 결과야. 그냥 그걸로 된 거야. 앞으로 네가 어떤 삶을 살든,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온 그 사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야. “
그렇게 말하던 제니가, 주방으로 가 창가에 있던 작고 동그란 돌멩이 하나를 가져와서는 나에게 쥐어주었다.
“이게 내 행복이야. 언젠가 바닷가로 놀러 갔다가 아주 완벽하게 동글 납작한 이 돌멩이를 찾았는데, 그냥 행복하더라고. 이상하지? 그런데 그 이후로도 이 돌멩이만 보면 기분이 좋아져서 거의 몇 년째 이렇게 잘 보이는 곳에 올려놓고 있어. 아주 별개 아닌데 말이지. 거창한 일을 하지 않아도, 행복은 어디에나 있어. 네가 스스로를 다그치고 노력해야만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러면서 본인의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와는 다르게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또 나와는 다른 우여곡절을 겪으며 자라나, 꽤나 큰 패션 비즈니스를 이끌었던 본인의 이야기를.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나라를 옮겨 다니며 사느라 자연스레 일을 놓게 되었지만, 그때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이 다르지 않다고 했다. 그냥 어떤 상황에서든 내 눈앞에 보이는 행복을 찾고 그것에 만족하며 살아가면 되는 거라고. 본인은 본인의 조용한 하루를 사랑한다고.
독일로 이사오며 제니와의 행복한 수요일은 그렇게 끝이 났다. 벨기에를 떠난 지 두세 달 즈음되었을 때, 우리 가족은 그리운 친구들을 보러 다시 벨기에를 방문했다. 이틀을 제니네 집에 묵으면서, 남편과 아이들이 잠든 저녁이면 오붓이 둘이서 묵혀준 이야기를 꺼내 나누었다. 나는 사이먼과 나누었던 죄책감에 대한 이야기와 독일로 이사 후 남편, 아이들과 유난히 투닥거리며 보낸 지난여름날의 이야기들을 제니에게 들려주었다. 제니는 조용히 내 이야기를 듣더니, 거실 서랍 어딘가에 있던 팔찌를 꺼내와 보여주며 말했다.
“읽어봐. 뭐라고 적혀 있는지.”
“F*ck it? 신경 꺼, 될 대로 돼라, 뭐 그런 말 아니야?”
“응, 맞아. 내 좌우명이기도 하지.”
제니의 오래된 소꿉친구가 선물해 준 팔찌라고 했다. 친구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제니가 그렇게 얘기를 해줬단다. 제니는 내게도 그렇게 말했다.
“너의 어릴 때 이야기, 가족들과의 일들, 회사에서 힘들었던 것들. 다 개나 줘버려. 거기에 갇히지 마. 이미 다 지나간 일들일 뿐이고, 그것들이 지금의 너를 힘들게 하도록 내버려 둬선 안 돼.”
뭔가 말로 내 머리를 콕 쥐어박는 느낌이었다. 내가 왜 지금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되었는지 자꾸 뒤를 돌아보며 되짚어가지 말고, 그냥 다 잊어버리라고 했다. 죄책감이고 뭐고 내가 버리기로 마음먹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말이다. 제니가 맞았다. 사실 의미 없는 죄책감을 만들어낸 것이 나라면, 이 것을 없애버리는 것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냥 흘려보내면 그만 인 것들에, 나 스스로가 영양분을 주고 내 안 깊숙한 곳에 자리를 내주고 있었다. 제니와 이야기를 하다 보니, 결국 내가 내 병을 키우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F*CK IT!!!”
제니와 나는 번갈아가며 아주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이 구호를 외쳐댔다.
“그래 은지야. 그냥 잊어버려. 개나 주라 그래. 그럼 아무 일도 아니야.”
가끔은 전문가와의 상담보다, 옆 집 친구의 진심 어린, 어쩌면 거침없는 조언이 더 내 마음 가까이 다가와 닿는다. 번아웃도 마음의 병이다 보니, 자꾸 의기소침해지고 혼자 있고 싶어 밖을 나가기가 꺼려졌는데, 이렇게 나를 불어내주고 내가 혼자만의 생각에 갇히지 않게 꺼내주는 사람이 옆에 있어 참 다행이었다. 이제는 또 새로운 곳에 혼자 떨어져 다시 집 안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이 지구상 어딘가에 나를 걱정해 주고 내게 선뜻 시간과 공간을 내어주는 친구가 있으니, 가끔 외로움이 찾아올 때면 마음속으로 'F*ck it'을 한 번 외치고 조용히 내 손이 닿는 거리에 있는 행복거리를 찾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