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에 대한 고찰
나와 루미큐브의 인연은 내가 고등학생이던 2002년 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포항 시내에 '보드게임방'이라는 것이 생긴 후, 이곳은 친구들과의 나들이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코스가 되었다. 일정한 요금을 결제하고 나면 다양한 게임을 즐길 수 있었지만, 나의 단짝친구 현경아와 나는 주야장천 루미큐브만 해댔다. 심지어 미국 교환학생을 갔을 때도, 남들은 아이폰이다 뭐다 근사한 것들을 사서 올 때, 나는 다른 것은 모두 마다하고 커다란 루미큐브를 보물처럼 모셔왔더랬다. 수많은 보드게임을 즐겨봤지만, 나는 아직도 나달 나달한 상자에 담긴 루미큐브를 꺼내 놀 때가 가장 신이 난다.
우울감이 찾아오고 나서는 즐겨보던 넷플릭스 드라마도, 한국 버라이어티도 모두 흥미를 잃었다. 어떤 것도 재미가 없고, 손 닿을 있는 아이패드의 전원을 키는 것조차도 귀찮아졌다. 그러다 시작하게 된 것이 모바일게임이었다. 예전에는 기사를 읽거나 유튜브를 보다 게임 광고가 뜰 때면, '이런 걸 누가 하나' 했는데 그걸 내가 시작한 것이다. 오랜만에 테트리스도 하고, 길 찾기 게임도 하고, 똑같은 모양의 블록을 모아 터트리는 게임도 해 보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게임이 하루 이틀이면 시시해져 금세 내 휴대폰에서 지워졌다. 그러다 이왕 이렇게 게임을 할 거면 내가 좋아하는 게임을 하자 싶어, 루미큐브의 모바일 버전을 찾아 시작하게 되었다.
창피하지만 남편이 잠든 후까지 게임을 했다. 아이들과 노는 것도 뒷전에 두고 한 뼘짜리 휴대폰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기존의 보드게임과는 달리, 한 게임을 이길 때마다 포인트도 생기고 다음 레벨로 넘어갈 수 있는 시스템도 갖춰져 있어, 동기부여가 확실히 되니 게임이 배로 재밌었다. 나의 20년 루미큐브 인생동안 포인트나 돈을 걸고 이 게임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막상 무언가를 걸고 게임을 하다 보니 조금씩 욕심이 생겼다. 포인트가 올라간다고 누가 알아줄 것도 아니고, 내 인생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럼에도 난 점점 더 액수가 큰 판에서 놀기 시작했다. 이기면 그만큼 많은 포인트를 얻을 수 있었지만 반대로 한 판 한 판 질 때마다 잃는 포인트도 커졌기에 어느새 재미보다는 스트레스가 쌓여만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손바닥 만한 휴대폰 화면을 노려보며 씩씩 화를 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 하고서야 그 게임을 멈출 수 있었다.
처음 아이를 낳고 육아휴직을 가질 때였다. 이른 아침, 남편이 회사로 출근하는 모습을 보면 질투가 나 견딜 수가 없었다. 출근과 동시에 남편의 시간은 돈으로 환산이 되었지만, 나의 시간은 그저 '0'에 머물렀기 때문이었다. 휴직 전에는 나의 한 시간이 남편의 한 시간보다 더 값이 나갔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나의 한 시간이 아무런 가치가 없어졌다고 느꼈다. 사랑하는 내 아이를 낳아 키우고 함께 보낼 수 있는 그 시간을 어찌 돈으로 환산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현실적인 눈에서, 크던 작던 생산성이 있고, 가치를 창조해 내던 시간이 갑자기 멈춰버린 기분은 피할 수가 없었다.
최근 병가를 시작하고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육아휴직을 할 때보다 연차도 올라가고 승진도 많이 했으니, 나의 시간은 그때보다도 훨씬 더 값이 나갔다. 어쩌면 '시간=돈'으로 계산되는 컨설팅 회사에 다녀서 그런 생각을 은연중에 해왔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번아웃과 동시에, 나의 시간이 다시 '0'이 된 것이다. 다행히 보험 덕에 경제적으로 궁핍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내 시간의 생산성이 사라진 기분은 지울 수가 없었다. 이따금씩 '내가 지금 일을 했다면'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지금이, 나 자신을 낭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루미큐브를 하면서도 이와 같은 생각들이 머릿속에 스멀스멀 떠올랐다. 한 게임을 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같으니, 무조건 판돈이 큰 게임에 참여하는 것이 이득이라 생각했다. 어쩌다 한 판에 걸린 포인트가 적은 게임을 시작할 때면, 내 시간이 아깝게 느껴졌다. 그래서 계속 포인트가 더 큰 게임을 하다 보니, 게임을 할 때마다 긴장도와 스트레스가 높아져갔다. 분명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게임 포인트일 뿐인데, 그 숫자가 더 커지기를 바라며 나는 게임의 재미를 잃어갔다. 지난 오랜 시간 동안 한 번도 질린 적 없이, 나에게 행복한 시간을 만들어주던 게임이었는데 말이다.
작년 초, 스트레스가 몸으로 느껴지기 시작했을 때, 지금 하는 일이 나에게 맞지 않다고 느꼈을 때, 그때 회사를 그만뒀더라면 번아웃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회사를 그만두지 못한 다양한 이유가 있었지만, 그중 '몸값'이라는 것이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내가 이 일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았을 때 지금만큼의 수입을 얻을 수 있을까?'
'다른 일을 찾지도 않았는데 당장 그만둬버리면, 그냥 시간만 낭비하는 것이 아닐까?'
시간은 돈으로만 환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이 계산법에 빠지기 시작하면 출구를 찾기가 어렵다. 어쩌면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이런 계산법으로 힘든 직장생활을 이겨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에너지가 고갈되어 버린 사람에게 이런 생각은 그저 독일뿐이다.
몸값이 오른다고 행복이 더 커지는 것은 아니다. 적은 월급으로 대학시절 학자금을 갚으며 혼자 생활을 꾸려나가던 새내기 시절이 지금보다 훨씬 더 보람차고 행복했다. 연봉이 높지는 않아도, 이 사회에서 내가 혼자 벌어먹고 살 수 있게 됐다는 것에 안도했던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보다 훨씬 더 반짝였다. 나에게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런데 점점 더 많이 가지게 되자, 되려 점점 더 불안해졌다. 없어도 되는 게임 포인트에 혈안이 되어 하루 종일 휴대폰을 손에 쥐고 살던 얼마 전의 나처럼 말이다. 인생은 게임이 아닐진대, 내 몸값을 더 올려 어디에 써먹겠는가. 내 시간을 돈으로만 따진다면, 내가 공장의 기계들과 다를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이제는 이런 계산법을 내 머리에서 지워버리려고 한다. 내 시간은 그냥 내 것이다. 나는 인간이니까, 내 시간을 값으로 환산할 필요 따위는 없다. 의식주가 해결되고, 내 가족들이 고생하지 않고 살 수 있는 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 거다. 이제까지의 나도 나지만, 앞으로의 나는 조금 달라도 괜찮지 않은가. 이렇게 생각하니,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제까지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것을 시작해도 좋고,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이라도 조급하지 않게 해 나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직 무언가를 시작할만한 에너지는 없지만, 언젠가 내 연료창고가 조금씩 차오르는 날이 오면, 더 이상 시간의 값어치 따위는 제쳐두고, 그냥 내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여 보려 한다.
여행을 다녀올 예정입니다. 잠시 쉬었다 다시 연재를 이어갈까 해요. 부족한 글 읽어주심에 감사한 마음 전하면서, 11월 중순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