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ut up and hug!"
2025년 여름, 우리 가족은 지난 6년 간의 벨기에 생활을 마무리하고 독일로 다시 돌아가기로 했다. 처음 벨기에에 와서 워터루에 자리를 잡을 때만 해도 모든 것이 낯설고 차갑게만 느껴졌는데, 운이 좋게도 좋은 사람들과 오랜 시간 마음을 나누다 보니, 어느덧 이곳이 지구상에서 가장 마음이 편한 내 동네, 내 집이 되었다. 나에게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면,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이곳에 뿌리를 내렸겠지만, 처음부터 남편의 회사일로 온 것이었고 언젠가는 떠날 것을 알고 있었기에 꽤나 담담하게 안녕을 맞이했다. 이제는 나라를 넘나드는 이사 따위가 큰일이 아니기도 하고, 마음만 있다면 인연은 얼마든지 이어갈 수 있다는 걸 알기에 웃는 얼굴로 이별을 고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문제는 독일에 와서 시작됐다. 아무렇지 않게 벨기에를 떠났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마음에 큰 구멍이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보고 싶은 사람들, 소박하지만 사랑스러웠던 거리들, 익숙했던 모든 것들이 그리웠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낯설고 불편한 모든 것들에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독일로 이사하며 쌓여있던 관공서 업무와 새집 단장에 정신없던 남편에게는 스트레스가 쌓여갔다. 아직 정리가 안 된 집안은 치워도 치워도 할 일이 넘쳐났고, 방학 중이라 집에만 있던 아이들은 놀아달라며 끊임없이 엄마 아빠를 불러댔다. 그럼에도 남편은 내가 괜찮은지부터 살폈다. 뭐 도와줄 게 없냐며, 계속 나에게 말을 걸었다. 고맙게 생각해야 하는데, 나는 그런 챙김이 너무나 귀찮았다. 그냥 나의 불편한 표정 따위는 모른 채 해주기를 바랐는데, 남편은 내 얼굴을 볼 때마다 괜찮냐고 물었고, 그럴 때마다 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렇게 우리의 소리 없는 싸움이 시작되었다. 큰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화기애애하지도 않은 그런 상태가 계속 이어졌다. 그러다 조용한 활화산이 터진 것은, 인테리어 업체와 미팅이 있던 어느 날이었다. 남편은 회사에서 바로 출발을 하고,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약속 장소로 가기로 했는데, 내가 길을 헷갈리는 바람에 약속 시간에 5분 정도 늦게 도착했다. 미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운전대를 잡은 남편은 차 안에서도, 집에 도착해서도 성질이 가득 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한테 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하루 종일 퉁명스럽게 구는 남편을 보자니, 이제는 내 안에서 화가 차 오르기 시작했다. 사람이 살다 보면, 거기다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다 보면 5분 정도 늦을 수도 있지, 그게 뭐 대수인가. 결국 우리 마음속의 화가 차올라 참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자,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고 난 뒤, 아주 오랜만에 침대에 마주 앉았다.
"5분 늦은 게 그렇게 화낼 일이야? 늦을 것 같다고 미리 말도 했고, 나도 최선을 다해서 달려갔는데, 그렇게 아이들이 불편할 정도로 화를 계속 내야 해?"
"오늘 뿐만이 아니잖아. 집과 관련된 일이든, 관공서를 가야 하는 일이든, 다 내가 하고 있잖아. 나도 힘들어. 그리고 너는 요즘 무슨 일이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하잖아."
"별 일도 없으니까. 딱히 할 말도 없고. 나도 내가 무슨 생각으로 사는지 모르겠는데, 왜 자꾸 내 생각을 말하라는 거야."
"도대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남편인데, 나랑 말이 하기 싫으면 어쩌자는 거야."
번아웃 치료를 받는 내내, 나는 한 가지를 아주 간절하게 바랐다. '혼자 있는 것.' 번아웃 진단을 받자마자 회사와는 멀어질 수 있었지만, 가족들과도 멀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의 아내이고 누군가의 엄마이니까. 함께 살고 있는 가족이 있는데, 어찌 내가 혼자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사이먼도 항상 주의를 줬던 내용이었다.
"번아웃은 회사로부터만 온 게 아니에요. 가족으로부터도 왔지요. 그러니 집에 있을 때도 너무 많은 걸 하려고 하면 안 돼요."
그런데 그게 어찌 가능하단 말인가. 남편은 출근을 하고, 나는 집을 지키고 있으니 자연스레 집안일은 내 차치가 되어갔다. 남편이 많이 도와준다고 해도, 집안일에서 해방이 되기란 쉽지가 않았다. 게다가 하루 종일 집에 있는 엄마로서, 아이들과 떨어져 있기란 더더욱 쉽지가 않다. 그래서 집안일과 아이들에게 에너지를 쓰는 대신, 남편에게 쓰는 에너지를 줄여나갔다. 어른이니까, 남편이니까 이해해 줄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 뭘 하는 건지 모르겠어. 나한테도 번아웃이 올까 봐 걱정돼."
남편에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리고는 상담을 받아봐야 할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다.
내 남편 마크는 아주 건실한 독일 청년이다. 매일 저녁 운동을 하고, 웬만해서는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사람. 무슨 일이든 논리적으로 따져보고, 상처받을 거리를 만들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것 같아 미안함이 몰려왔다. 뭐라도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냥 이 깜깜한 동굴에서 나갈 방법을 모르겠어. 점점 더 무서워. 평생 이렇게 살게 될까 봐. 그리고 이렇게 우울한 엄마고 아내인 게, 스스로 짜증이 나서 견딜 수가 없어."
생각나는 대로 지껄이고 나니, 울음이 터져 나왔다. 굵은 울음 덩어리 같은 것들이 저기 심장 깊은 곳에서부터 줄줄이 토해져 나오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사이먼과 부부상담을 시작했다. 독일에서는 정신과 상담을 받으려면 2년은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라, 원격으로 사이먼에게 계속 상담을 받는 상황이었다. 우리는 어떻게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 차근차근 설명했다. 나는 말이 점점 없어지고, 마크는 스트레스가 점점 쌓여가는 과정에서 집안에 할 일은 넘쳐났던 그 상황 말이다. 사이먼이 내게 물었다.
"은지 씨는 남편이 무얼 해주기를 원하나요? 어떻게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안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그냥 저를 내버려 뒀으면 좋겠어요."
이번에는 남편에게 물었다.
"그럼 마크씨는 지금 부인이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나요?"
"제가 어떻게 도와줘야 되는지 알려줬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사이먼이 말했다.
"방금 은지 씨가 이야기한 거 들었죠? 은지 씨는 남편이 아무것도 안 해주기를 바란대요. 그러니까 그냥 가만히 계세요."
남편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모니터 속의 사이먼을 바라보았다.
"은지 씨의 번아웃을 치료하는 건 저와 의사가 할 일이에요. 이미 우리는 은지 씨와 열심히 그 일을 하고 있고요. 지금 부인의 상황을 낫게 하는 건, 마크 씨의 역할이 아니에요. 은지 씨가 원하는 대로, 아무것도 하지 말고, 은지 씨가 혼자 원하는 속도로 노력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마크 씨는 은지 씨를 돕고 싶어 해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답답할 수도 있겠지요. 남편은 뭐라고 해주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말을 하고 싶지 않다면, 그냥 안아주는 건 어때요? 그것도 힘들까요?"
"뭐, 그냥 안는 거 정도야 괜찮지 않을까요?"
그렇게 우리는 뭔가 상황이 좋지 않을 때, 상대방이 우울하거나 힘들어 보일 때, 그냥 안아주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닥치고 그냥 안아! (Shut up and hug)!'라고 불렀다. 마크는 이 세션이 끝나자마자, 언제 얼굴을 붉히며 화를 냈었냐는 듯, 아주 개운하고 밝은 얼굴로 룰루랄라 커피를 마시러 주방으로 향했다. 나는 항상 해오던 상담이니 큰 감흥이 없었는데, 마크는 한 번의 세션만으로도 속이 뻥 뚫린 듯 시원해졌다고 했다. 뭘 해야 할지 몰라 답답했는데, 사이먼이 뭘 해야 하는지 말해줘서 이제 걱정이 사라졌단다. 역시 남자는 남자인가. 문제가 주어지면,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데, 내가 '아무것도 하지 마'라고 말해서 답답했던 것인가. 다소 우스운 해결책이라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생겨 신이 난 마크는 금세 예전의 모습을 되찾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