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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어느 날 찾아온 선물

내가 회사를 떠날 수 없었던 이유

by 달하달하

나는 내 회사 BCG, 그리고 내 팀 Platinion을 매우 사랑했다. 명성 있는 회사에서 나를 찾아준 것도 고마웠고, 육아휴직 중인 나를, 거기다 둘째까지 낳은 나를 기다려주고 받아준 회사를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3-6개월 정도의 프로젝트가 쉬지 않고 이어지지만, 매번 새로운 과제에 매일매일 무언가를 배워나간다는 기분이 좋았다. 거의 매일 야근을 하며 동료들과는 전우애가 쌓일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우리는 가족 같은 팀이 되었다. 번아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자꾸 지치고 실수가 많아질 때 즈음, 친한 동료들 한 둘에게 나의 상태를 공유한 적이 있었다. 나는 내 일이 좋고, 내 팀이 너무 좋은데,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팀 내 유일한 워킹맘이었던 나를 경이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동료들은, 나를 안쓰럽게 여기면서도, 어쩌면 이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막상 번아웃 진단을 받고 긴 병가를 내고서는, 팀원들과 연락하지 않았다. 갑자기 사라진 나를 궁금해했겠지만, 다양한 프로젝트로 흩어져 일하는 환경 탓에 어쩌면 꽤나 긴 시간 내가 일을 쉬고 있다는 것도 몰랐을 수 있을 것 같다. 어쨌든 누구에게 연락해서 길게 설명할 에너지가 없기도 하고, 자기의 자리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을 그들에게 '번아웃'이라는 단어 자체가 영향을 주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에 나는 아무에게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나의 유일한 연락 창구는 인사팀. 병가가 연장될 때마다 간략한 메일을 보냈다.

'좋은 하루 보내고 있기를 바랍니다. 병가 연장을 위한 의사의 소견서를 첨부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메일을 보낼 때마다 1인분을 못 해내고 빈자리를 만들어버려 팀원들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갑자기 해고 통보를 받을 것 같아 무섭기도 했다. 알고 보니 벨기에에서는 병가 중 직원을 자를 수 없는 법이 있어 쓸데없는 걱정일 뿐이었지만, 미안한 마음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지난번 통보한 병가일이 끝나갈 즈음, 어김없이 또다시 메일을 보냈다. 1주일이던 병가가 2주가 되고, 2주이던 병가가 1달이 되고, 1달이던 병가가 3개월씩 연장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한숨이 나왔다. 채 20명이 되지 않는 작은 팀이었기에, 거기다 가장 해야 할 일이 많은 프로젝트 리더가 이렇게나 길게 자리를 비우면, 프로젝트를 이어나가기가 쉽지가 않다는 것을 알기에 나의 미안함은 더욱 커져만 갔다. 남편과 의사는 '회사는 회사일 뿐이야, 그들은 어떻게든 살아남아.'라고 말했고, 나도 이 큰 회사에서 나는 한낱 점일 뿐인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이 회사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부대끼던 사람들이 걱정되는 것이었다. 평소 같으면 메일을 보내고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걱정 말고 몸조리 잘하세요.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 줘요.'라며 짧지만 따뜻한 답장이 왔었는데, 이번에는 하루가 지나도록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러고 나니 나의 부질없는 걱정이 자꾸 커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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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일을 보낸 다음 날, 집 앞에 커다란 꽃다발이 놓여있었다. 처음에는 남편이 보냈나 하며 오늘은 무슨 기념일인지 꼽아보았는데, 안에 편지를 보니, 우리 팀 시니어 매니저들의 이름이 보였다. 잘 지내라고, 다들 보고 싶어 한다고, 다시 돌아오길 바란다고. 메일이나 문자 메시지였다면 형식적으로 느껴졌을지도 모를 말들이었지만, 꾹꾹 눌러쓴 그 글씨들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독일에서 일할 때는 느껴보지 못한, 그리고 유럽의 다른 회사들에서도 흔하지 않은, 마음이 오가는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는 것을 다시 실감했다. 그러고 보니 이 전부터 약속이나 한 듯 한 주 걸러 한 주, 동료들에게서 문자가 왔다.

"오늘 회사에서 가족동반 행사가 있었어. 너 생각이 많이 나더라. 힘내."

"잘 지내고 있지? 언젠가 누군가 만날 준비가 되면, 연락 줘."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문자는 이 것이었다.

"은지, 서두르지 말고 너한테만 집중해, 이기적으로 (Be selfish)."

벨기에 팀을 이끄는 존-마크가 보낸 문자였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었다. 엄청난 식도락인 존-마크는 나의 런치 메이트였다. 나이차이가 무색하게 젊은 감각과 유머감각으로 함께 있으면 언제나 웃음이 지어지는, 나의 롤모델. 언제나 밝지만, 그 또한 과거 직장에서의 스트레스로 꽤 긴 시간 고생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는 자기 삶의 신조를 바꿨다고 했다.

'즐겁게 살기.'

존-마크는 더 이상 승진을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의 자리가 자신이 가장 즐길 수 있는 최적의 자리라고. 열심히 일하되 자신을 더 이상 힘들게 하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지금 이 정도가 충분해.'라고 말하는 그를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봤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이 분을 나의 롤모델로 삼았는데, 나는 결국 나를 있는 힘껏 괴롭혀 이 자리까지 왔나 보다.




또 며칠이 지나고, 뜬금없는 소포가 도착했다. 열어보니 친하게 지내던 동료, 마킬이 보낸 것이었다. 심지어 부인, 두 딸과 함께 쓴 편지를 곁들여서. 우리 회사에 온 지 채 일 년이 되지 않았지만 아이들이 또래라 금방 친해진 친구였다. 회사에서 힘들 때도 자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마킬은 내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회사는 회사일 뿐이야. 나는 팀이 좋지만, 이 회사가 주는 경제적 혜택에 만족해서 다녀. 그런데 어느 날, 내가 이 회사에서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다고 느끼면 나는 떠나겠지."

맞다. 사람은 사람이고, 회사는 회사인데. 회사 사람들 하나하나에 마음을 쓰는 나를 이해하면서도, 그것으로 인해 상처받거나 억지로 회사에 남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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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불완전. (Perfectly Imperfect)'

다소 아이러니한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물건이었다. 자세히 읽어보니 '킨츠키 (Kintsugi)'라는 일본의 도자기 수리 기법으로 금이 간 도자기에 금선을 그려 넣어 새롭게 만드는 제품이 들어있는 선물세트였다. 그리고 브랜드의 이름은 치유 (CHIYU). 어쩌면 나에게 딱 맞는 이런 선물을 골랐을까.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 어떤 불완전한 것이라도 그 만의 아름다움이 있어. 지금 힘든 시간을 겪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너의 모습이 사라지진 않아..."

실패자라고만 생각했는데, 누군가는 '그럴 줄 알았어, 그렇게 밀어붙이더니.' 하며 손가락질할 줄 알았는데, 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보내주는 이 응원들에 심장이 저릴 만큼 고마웠다.


'모든 것에는 금이 있어요. 그 틈이 있기에 빛이 들어올 수 있는 거죠 (There's a crack in everything, that's how the light gets in).'

마킬이 보내준 선물상자는 아직도 그대로 내 서재에 잠자고 있지만, 이 상자 안에 적힌 글귀 하나하나는 아직도 내 마음에 자그마한 빛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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