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는 가소롭고 안쓰러운 몸짓뿐일지 몰라도
내가 살고 있는 '벨라 비타 (Bella Vita)'는 계획형 커뮤니티 같은 곳으로, 노후를 맞은 어르신들이나 우리처럼 외국에서 온 젊은 가족들이 함께 어우러져 지낸다. 유기농 슈퍼마켓, 의료센터, 레스토랑 및 다양한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으나, 나는 사실상 슈퍼마켓을 빼고는 거의 쓸 일이 없었다. 이제 시간이 생겼으니, 매일 눈으로만 보던 운동 시설들을 좀 활용해 봐야겠다 싶어 곧장 시설관리소로 갔다.
"안녕하세요. 저 수영장을 좀 쓰고 싶어서 그런데, 얼마나 내야 할까요?"
"아, 몇 시에 쓰실 건가요? 벨라 비타 주민이면 누구나 오후 12시부터 2시까지 무료로 쓸 수 있어요."
원래 운동 시설을 쓰려면 따로 회원권을 사야 한다고 들었는데, 수영장은 매일 무료였다니. 회사 일이 바빠 자주 쓸 시간이 없어 당연히 거들떠도 보지 않았는데, 공짜인지도 모르고 지낸 지난 6년이 아까워서 나는 그날부터 매일 수영장의 출근 도장을 찍었다.
내가 처음 수영을 배운 것은 대학생 때이다. 기숙사에 살던 친구 몇 명이 학교 근처에 있는 수영장에서 아침 수영 수업을 듣는다는 말을 듣고 쫄래쫄래 쫓아갔더랬다. 원래 물을 무서워하던 나는 남들보다 더뎠기는 했지만, 두세 달 수업을 들으며 자유형과 배영까지는 편히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유럽에 와서 살고 보니, 나의 수영실력으로는 어디 가서 명함을 내밀기가 부끄러운 수준이었다. 어느 날 독일 친구들과 호숫가로 놀러를 갔는데, 모두들 머리를 빼꼼 내밀고 아주 평화로이 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나 혼자 얼굴 물속에 풍덩 담근 채 몇 번 팔을 젓고는, 깜깜한 바닷속을 보는 것이 무서워 후다닥 나왔던 기억이 있다. 자유형과 배영을 마스터한 나지만, 안타깝게도 친구들은 나를 '수영 못 하는 애'로 불렀다. 독일에서는 학교에서 생존수영이라고 불리는, 헤드업 평영을 필수로 배우니 물속에서 머리를 들지 못하는 내가 이상해 보일 수밖에. 그때부터 우아하게 머리를 들고 고요하게 팔을 저으며 물 위를 가르는 수영을 배우고 싶다고 생각만 했었는데, 드디어 기회가 온 것이다.
처음 며칠은 자유형 팔 젓기를 하며 고개를 들려고 바둥바둥하다 엄청난 양의 물을 먹었더랬다. 다행히 내가 가는 점심시간에는 나를 빼고는 아무도 없어 다행이지, 누군가가 봤더라면 내가 물에 빠지는 줄 알고 119를 불렀을 것이다. 답답한 마음에 유튜브로 이런저런 수업을 찾아보며, 눈, 코, 입 순으로 서서히 고개를 들 수 있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고개를 다 드는 것은 불가능처럼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온몸이 힘이 쭉 빠지고 몸이 붕 뜨더니, 자연스레 고개가 물 밖으로 나왔다. 따로따로 하던 팔 젓기 다리차기가 한데 어우러져 몸에 발란스가 맞아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지난 두 달간의 고군분투가 드디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왠지 절대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하던 일이 어느 날 이뤄지고 나니, '그래, 안 되는 건 없어. 수영도 됐잖아.' 하며 다른 것들도 '절대' 안 되는 것은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스멀스멀 긍정 에너지가 올라왔다.
나의 두 번째 도전과제는 달리기였다. 한국에 살 때는 10km 내외의 짧은 마라톤 행사들에 참여하며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뛰곤 했었는데, 유럽에 오고 나서 두 번의 임신기간을 지나며 어느새 뛰는 것이 어색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작년 벨기에에 '크노케 (Knokke)'라는 바닷가 도시로 워크숍을 갔을 때의 일이다. 시원한 바닷바람과 함께 아름다운 휴양지의 풍경을 즐기며 아침 러닝을 하기로 한 날, 동료들과 기분 좋게 발을 구르기 시작했는데, 채 5분도 되지 않아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다들 일주일에 적어도 한 두 번 러닝을 한다던 동료들은 바람을 가르며 이미 저 멀리 점이 되어 나에게서 멀어져 갔다. 처음에 나와 속도를 맞춰주던 동료에게도 미안하다며 먼저 가라고 손짓하고는, 나는 벤치에 누워 한참 숨을 고르다 결국 호텔로 돌아갔다. 나중에 한 동료가 찍어 놓은 나의 모습을 보니, 달리기라고 하기에는 '빠른 걸음'에 가까운 몸짓이었더라. 그럼에도 그렇게 숨을 헐떡이며 힘들어했다니.
벨기에로 이사 오고 나서 한 번 지독한 우울증을 겪었던 기억이 있는지라, 나는 어떻게든 내 몸뚱이를 일으켜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현관문을 여는 것조차 힘들어지기 전에, 집에서 가장 편한 옷을 입고 오래된 운동화를 꺼내 신고는 집 밖으로 나섰다. 오랜만에 '뛴다'는 행위를 하고 보니 100m도 채 되지 않아 숨이 가빠왔다. 그래서 첫날에는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1km를 겨우 채웠던 것 같다. 그럼에도 매일매일 뛰었다. 이른 새벽, 아이들과 남편이 일어나기 전, 그냥 나가서 뛰었다. 그렇게 매일 뛰고 나니, 무릎이 망가졌다. 매우 무지한 상태에서 무작정 하루도 쉬지 않고 나가 뛰었더니 몸에 탈이 난 것이다. 그래서 달리기를 시작한 지 몇 주가 채 되지 않아, 러닝은 멈추고 대신 물리치료를 시작하게 되었다. 일 년에 한 번도 달리지 않던 사람이, 무식하게 매일매일 달리기를 하겠다고 그렇게 요란을 피웠으니. 달리기 조차 열심히, 꾸준히 하려고 터무니없는 목표를 세우고 내 몸을 보살피지 않은 내가 한심했다.
무릎의 통증이 사라지고 나서, 다시 달리기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무리하지 않기 위해 하루를 뛰고 나면 이 삼일은 쉬면서 몸이 회복될 수 있게 기다려줬다. 그렇게 꾸준히 달리다 보니 숨도 점점 덜 차고, 어느덧 쉬지 않고 3km 정도는 거뜬히 뛸 수 있는 체력이 되었다. 그렇게 자주 달리다 보니, 이제는 달리지 않으면 금세 답답함이 느껴졌다. 달리기라는 행위 자체만큼, 아무도 없는 새벽, 서서히 밝아지는 풍경을 보며 시원한 바람을 맞는 그 기분 자체가 좋았던 것 같다. 가끔 혼자 달리는 것이 심심하다 느껴질 때는 스포티파이를 켜고 팟캐스트를 들었다. 처음에는 뭔가 자기 계발에 도움이 될만한 걸 찾아 들으려 했으나, 번아웃까지 온 마당에 무슨 자기 계발이냐 싶어, 나중에는 그냥 재밌는 이야기를 찾다 '비밀보장'을 듣기 시작했다. 가쁜 숨을 겨우 몰아쉬다가도, 송은이와 김숙 언니의 화통한 웃음소리가 들리면, 나도 모르게 피식피식 웃음이 삐져나왔다. 번아웃이 오고 나서 울거나 화나는 일이 많았는데, 그나마 달리기는 하는 시간에는 내 얼굴에 미소가 스며 나왔다.
수영이나 달리기 보다도 더 오래된 나의 숙원사업은, '자전거'이다. 유럽 친구들은 자전거가 생활에 매우 중요하니, 운전을 못 하는 사람은 봤어도, 자전거를 못 타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지만, 내 인생에서는 자전거를 탈 일이 거의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 인생에 자전거를 가르쳐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리 바빠도 내가 자전거가 너무 타고 싶다고 졸랐으면, 어떻게든 부모님이 시간을 내주셨을 법 한데, 내가 워낙 겁도 많고, 어릴 적 아버지가 태워주셨던 자전거에서 떨어져 다친 일이 있어 부모님도 딱히 나에게 자전거를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셨던 것 같다. 어른이 되어서도 언젠가는 자전거를 꼭 배워보고 싶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작년 크리스마스에 남편이 사준 자전거도 있겠다, 집 앞에 넓은 주차장도 있겠다, 지금이 딱 좋을 때라는 생각이 들어 연습을 시작했다.
안타까운 사실은, 그 사이 나의 자전거 인생에 경쟁자들이 생겼다는 것이다. 7살이 된 이든이는 진작에 자전거로 묘기를 무리는 수준이 되어있었고, 4살짜리 이나 또한 페달이 없는 연습용 자전거로 열심히 나를 뒤쫓아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나보다는 먼저 자전거를 마스터하고 싶었던 난데, 나와 같은 날 자전거를 선물 받은 이나는 15분 만에 내 눈앞을 쌩하고 지나가며 나를 절망하게 만들었다. 나에게는 40년이 묶은 숙원사업이었는데, 이나는 4살 인생에, 15분 만에 그것을 이뤄낸 것이다. 옆에서 남편이 '훗'하며 겨우 웃음을 참아냈다. 나한테 자전거를 가르쳐줄 때마다 이렇게 쉬운 걸, 발만 굴리면 되는 걸 왜 못하냐며 핀잔을 주던 그는, 이나의 운전실력을 감탄과 공포의 감탄의 눈으로 바라보던 내게, 이 아이도 하는 거면 내가 못할 이유가 없다며 나를 더 재촉했다. 자전거 타기 전문가 이든이도 아예 내 자전거 옆에 자리를 잡고, '엄마, 봐봐요, 그냥 발을 굴려요, 내가 보여줄게요, 이렇게!" 하며 끊임없이 조언을 쏟아냈다.
결론은, 나는 아직도 자전거가 무섭다. 물이 무서워도 수영은 배웠고, 숨이 차도 달리기는 해냈는데 자전거는 여전히 쉽지는 않다. 그래서 아이들과 남편이 학교와 직장으로 떠나고 나면, 나 혼자 몰래 집 앞 주차장에서 자전거 연습을 한다. 동네 주민이 볼까 조마조마해하면서도, 뭐 보면 어떠냐 싶어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지금도 계속 연습을 한다. 자전거를 '탄다'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넘어지지 않고 직선도로 정도는 달릴 수 있다. 이렇게 하다 보면 언젠가 이나처럼 멋지게 유턴을 하는 날이 오겠지.
나에게는 매년 철인삼종경기에 참여하는 티어리라는 동네친구가 있다. 지난 몇 년간 여름휴가를 같이 보내면서 본 그 친구는, 거의 매일 15-20km는 아무렇지 않게 뛰고, 깊은 바다를 찾아가 2-3 km가 되는 거리를 순식간에 헤엄쳐간다. 이 친구에 비하면 나의 머리 들고 수영하기, 3 km 달리기, 넘어지지 않고 자전거에서 버티기는 아주 하찮은 몸짓에 불구할 것이다. 그럼에도 내게 이 우스운 철인삼종경기는 꽤나 큰 의미가 있다. 처음 번아웃으로 집에 머무르게 되었을 때, 나는 가만히 앉아 '내가 뭘 잘못했지? 나한테 왜 이런 시련이 온 걸까.' 하는 생각으로 하루를 채웠었다. 그러다 나 자신을 잘 구슬려 집 밖으로 나가고 운동을 시작하며, 내 몸에 에너지가 생기는 것이 느껴졌다. 어떤 상담이나 약보다도 나에게는 가장 분명한 효과를 보여주는 치료였다. 운동만으로 번아웃을 이겨낼 수는 없겠지만, 분명 더 나빠지지 않게 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는 게 분명했다. 그래서 번아웃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나를 조금 더 건강하게 지켜주기 위해, 나는 오늘도 현관문을 박차고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