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아웃을 빠져나갈 실마리가 될 것이라는 착각
주치의도, 심리상담사도, 그리고 남편까지 모두 ‘나를 위한 시간’을 보내라고 했다. 항상 일, 가족이 먼저였으니 ‘나’를 중심에 둔 시간을 보내라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그런데 내가 뭘 원하는지 생각해 내는 것이 복잡한 수학문제를 푸는 것보다도 어려울 줄이야.
남편이 여행을 가보지 않겠느냐고 권했다. 아이 둘 엄마에게 거절할 수 없는 달콤한 권유였기에, 바로 어디로 가야 좋을지 리스트를 만들기 시작했다. 햇살이 따스한 포르투갈로 가볼까, 아니면 오로라가 아름답다는 아이슬란드? 이 제안을 듣고 설렌 것은 딱 한 시간이었던 것 같다. 그 후로 비행기표를 알아보고 어디서 묵고 무엇을 할지 찾아보다 보니 이 것 또한 일처럼 느껴졌다. 언제나 그렇듯 ‘잘’ 하고 싶었으니까. 몇 번 없는 기회이니 후회하지 않을 완벽한 계획을 짜고 싶어 졌기 때문이다.
장고 끝에 결국은 한국으로 가기로 했다. 내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는 곳. 머리 써서 계획을 짜지 않아도 잘 곳이 있고 할 일이 넘쳐나는 곳. 하지만 남편이랑 아이들 없이 가는 첫 한국 여행이니 무언가 달랐으면 했다. 평소에 가족들과 있을 때 하지 못할 것을 하고 싶었다. 그때 갑자기 스무 살 후반에 떠났던 오키나와 여행이 생각났다. 일본에서 살고 있던 소영이와 떠난, 어쩌면 무모했던 그 여행. 계획 따위는 없고, 여행책을 찾아 매일매일 새로운 것을 해 보았던 그 여행. 이제는 한국에 살고 있는 소영이에게 연락했다.
“나 번아웃 이래. “
”아, 그렇군. 놀랍지는 않아. 괜찮아? “
“응 그럭저럭 살만 해. “
“그렇군. “
“한국에 갈까 해. 마크랑 애들은 두고. 너랑 여행 가려고.”
“좋아.”
그렇게 얼렁뚱땅 여행일정이 생겼다. 어디로 갈지 얼마나 오래 갈지는 모르지만, 소영이랑 실컷 이야기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마냥 신이 났다. 미국 교환학생 시절, 소영이를 처음 만났을 때는 나와는 다른 세상의 사람이라 생각했다. 뉴질랜드와 일본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영어와 일본어가 완벽한, 멋진 아이. 한 학기 내내 손들고 영어로 질문 한 번 하는 것이 소원이었던 나는, 그런 소영이가 마냥 부러웠다. 어쩌면 공통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우리는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기숙사 방에서 밤을 꼴딱 새우며 이야기를 나눴다. 가족 이야기, 학교 이야기, 세상 이야기. 무슨 이야기를 해도 재미있고 행복했다. 오래된 소꿉친구들에게도 하지 못한, 마음속 깊이 숨겨둔 이야기들이 마구 튀어나왔다. 그럼에도 우리는 창피해 하기보다, 서로의 아픔을 안아주고 미래를 응원하는 사이가 되어갔다.
교환학생 기간이 끝나고 각각 도쿄와 서울로 돌아갔을 때도, 아주 뜬금없이 마음이 허할 때면 서로를 찾았다. 유난히 햇살이 따스하던 2010년 겨울의 어느 날, 잘했는지 못 했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 한 면접을 마치고, 허한 마음에 소영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면접을 잘했든 못 했든, 언니는 정말 멋진 사람이야. 난 언니가 항상 자랑스러워.”
잘 풀리지 않은 면접에 투털투털 넋두리를 늘어놓고 있던 나를 안아줬던 따뜻한 한 마디. 소영이는 언제나 그랬다. 좋은 대학을 나온 것도 아니고, 부유하게 자란 것도 아니고, 뭐 그리 잘난 거 하나 없는 나를 항상 멋진 사람으로 대해줬다. 나도 모르는 나 자신의 좋은 점들을 속속들이 찾아내어 나에게 알려주는 동생, 혹은 친구. 나에게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게 나에게는 자랑이었고, 힘든 시간을 거쳐 15년 차 경력을 쌓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이 순간까지 함께할 수 있음에 감사한 마음이다. 어쩌면 그래서 ‘번아웃’이라는 글자가 적힌 진단서를 받아 들었을 때 망설임 없이 소영이가 가장 먼저 생각났는지도 모르겠다. 언제나 그랬듯, 우리는 맛있는 것을 먹고, 눈에 보이는 곳에 들어가고, 쉼 없이 이야기를 나눴다.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한 1박 2일이 지나고 나니 바닥났던 에너지 창고가 조금씩 차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소영이와의 여행 일정 후에도 며칠의 시간이 남았다.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 첫 회사의 팀분들과 동기들을 만나야겠다고 생각났다. 아무것도 모르던 나의 가능성을 봐주고, 지금까지 벌어먹고 살 수 있게 해 주신 고마운 선배님들. 함께 우여곡절을 겪어가며 자라나 이제는 뿔뿔이 흩어져 내로라하는 회사에서 제 역할을 해나가고 있는 동기들. 나의 처음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어지러워진 지금의 상황을 조금은 정리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아주 오랜만에 만남의 자리를 마련했다.
“아이고 오랜만이야. 어떻게 왔어? 마크랑 아이들은 어쩌고?”
“아, 번아웃이라서요. 놀아요 요즘.”
“아 …”
다들 멀리 있던 나를 보기 위해 귀한 시간을 내어 반가운 마음으로 나왔는데, 첫 안부가 ‘번아웃’이라니. 다소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그럴만하지’라며 모두들 나를 이해해 주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이어나갈수록, ‘아뿔싸’하는 마음의 소리가 우러나왔다. ’혹시나 내가 너무 포시러운 삶에 젖어 살짝 데인 손 따위가 아프다며 들어 눕는 아이로 보이지는 않을까?‘ 나 또한 한국에서 일을 해봤던 사람으로서, 외국에서 일하는 것과는 다른 어려움이 분명 있기에, 모두들 번아웃이라 명명할만한 시간들을 견뎌냈을 텐데 말이다. 스멀스멀 걱정이 올라오고, 한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바로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네가 제일 힘들지. 잘 이겨낼 거야.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이십 대에 열정 넘치던 동기들은 어느새 애 아빠 엄마가 되어 아이들 크는 이야기가 이어졌고, 언제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시던 선배님들은 슬슬 퇴직 후의 삶을 이야기하셨다. 이 만남들로 내 지금의 고민들을 해결할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은 이기적인 마음이 아니었을까. 지금의 내가 어떻게 되었든, 그때의 열정 넘치던 나를 기억해 주는 사람들. 한풀 꺾여 의기소침한 나를 있는 그대로 안아주는 사람들. 아무렇지 않게, 10년이 훌쩍 넘은 그때로 돌아가 마음을 나누고 추억을 안주 삼아 같이 한 잔 기울일 수 있는 사람들. 어쩌면 나는 그냥 그런 사람들이 그리웠던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