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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삶에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가요

번아웃은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이 나에게서 멀리 있을 때 찾아온다

by 달하달하

의사와 상담사에게 번아웃이라는 진단을 받고 치료를 하고 있는 환자이지만, 나는 아직도 번아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내 주치의인 제라딘은 한 세션 내내 말도 못 잇고 눈물만 흘리던 나를 보고 번아웃이라 말했고, '지금 당장 일하러 갈 수 있겠어요?'라는 질문에 대답을 못하는 내게, 단호한 얼굴로 병가 연장서를 건네준다. 상담사인 사이먼은 '에너지가 없는 거예요. 아주 고성능의 로켓이라도 연료가 없으면 날 수 없죠. 지금 은지 씨가 그 상태인 거예요.'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나이롱환자인 것만 같은 이 기분을 떨칠 수가 없다. 한국이었다면 '남들도 다 힘들어, 그러니까 유난 떨지 마'라는 말을 듣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팔다리가 부러진 것도 아니고, 어디 눈에 보이는 상처 하나 없는데 기나긴 병가를 쓰고 있는 나 자신이 싫은 건지도 모르겠다. 어찌 됐든 환자니까, 나는 열심히 진료와 상담을 받는다.


사이먼과의 상담 초기에는 내가 어떻게 하다 에너지가 고갈된 상황이 되었는지에 대해 알아보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나의 어릴 적 이야기, 가족 이야기, 회사 이야기 등 자질구레한 질문과 답변들로 실마리를 찾아갔다.

"어른이 되고 보니, 저는 전형적인 '영웅증후군 (Hero Syndrome)'이 있는 아이였던 것 같아요. 알코올중독인 아버지, 그런 아버지 대신 가장의 역할을 하시던 어머니 밑에서, 언젠가는 내가 그 두 분 어깨의 짐을 가져가야겠다고 생각했나 봐요.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뭐든 열심히 했어요."

이미 두 아이의 엄마가 된 후였다. 알콜성 치매가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하셨던 아버지를 모시고 집에 오는 길에 동네 보건소에 있는 중독치료센터에 들렀다. 언제 다시 술을 마시고 난폭해질지 모르는 아버지와 다시 함께 살아야 하는 어머니에게, 가느다란 동아줄이라도 잡을 수 있게, 어떻게든 도움을 받아보고 싶었다. 담당자분과의 면담을 기다리는 사이, 책상 위에 놓인 팸플릿을 보는데, 알코올중독 부모를 가진 아이들에게서 보일 수 있는 증상 중에, 영웅증후군이 있다고 적혀있었다. 심장이 쿵 내려앉으며, '이게 바로 나로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만난 대부분의 정신과의사나 심리상담사들은 '동양권의 경쟁적인 교육제도나 지나친 사회의 기대가 번아웃의 요인이 되는 경우가 많지요. 은지 씨도 부모님과 사회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노력한 케이스일 테지요.'하고 운을 띄우는 경우가 많다. 물론 매우 동감하는 부분이지만, 나는 이와는 좀 다르다. 부모님은 휴일도 없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가게를 하느라 바쁘셨고, 나는 주로 혼자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가방을 싸고, 숙제를 하고, 준비물을 챙기는 모든 일이 다 나의 몫이었고, 부모님은 나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으셨다. 주변의 사람들도 우리 아버지가 어떤지 다 알고 있었기에, 딱히 그 자식인 내게 아무런 기대도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냥 묵묵히 내가 맡은 일을 열심히 했다. 엄청난 우등생은 아니지만, 말 잘 듣고 뒤처지지 않는 학생이었고, 그렇게 대학을 가고 회사생활을 시작했다.


또 한 가지 내가 빼놓지 않고 꺼내놓는 이야기는 '가면증후군 (Imposter Syndrome)'이다. 겉으로는 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려고 노력하지만, 속으로는 나의 부족한 모습이 들킬까 전전긍긍하는 사람. 누군가 나에게 칭찬을 하면, 저 사람이 나의 과대포장된 모습만 보고 있는 것 같이 항상 불편했다. 그리고 작고 초라한 나를 들키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하며 살았다. 어릴 적부터 그런 모습이 있었지만, 이것이 심해진 것은 첫 회사인 Oracle에 들어가고 나서부터였다. 그리 이름 좋은 대학을 나오지 않은 내가, 생각지도 못하게 좋은 회사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흔히 말하는 외국계 대기업. 입사통보를 받고는 지붕을 뚫고 날아갈 듯 행복했지만, 그 안에서는 '나는 아주 부족한 사람인데 나를 왜 뽑았을까'하는 생각이 언제나 마음속에 있었다. 항상 자신감이 없어서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면, 목소리뿐만 아니라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자신감이 찰 때까지 준비하면 좀 나아질까 싶어 밤을 새워가며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했지만, 그럼에도 업무의 크기나 중요도에 상관없이 언제나 긴장하고 불안해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은 나아져갔지만, 그럼에도 내 자신감은 언제나 저 바닥 어딘가에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 커리어는 성공가도를 달렸다. 또 다른 유망 회사에 들어가고, 예전부터 동경하던 컨설팅, 그것도 전략컨설팅 업계까지 진출했다. 더 좋은 기회가 생길 때마다, '면접관들이 나를 잘못 본 것은 아닐까. 혹시 나의 진모습을 보고 실망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떠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나에게 이런 기회들이 찾아오는 것이 감사해, 무서워도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어쩌면 그 덕에 오히려 점점 더 좋은 자리를 얻을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항상 부족한 나를 채우려 노력했으니까. 하루는 나를 뽑아준 선배에게 물었다.

"도대체 저를 왜 뽑으셨어요? 선배랑 한 인터뷰를 제일 못 본 것 같은데, 그때 막 몰아붙이셔서 당연히 떨어지겠구나 생각했거든요."

"넌 네가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더 노력하는 사람 (Insecure Overachiever)이거든, 그런 사람들은 끊임없이 성장해. 우리는 그런 사람이 필요하고."

머리를 쾅 얻어맞은 것 같았다. 역시 똑똑한 사람, 그래서 마음껏 부려먹으려고 날 뽑았구나. 안타깝게도 선배는 이런 사람들이 자기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탓에 언젠가 에너지가 고갈되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단점을 간과했다. 몇 년 전부터는 내가 면접관이 되어 일 이 주에 한 번씩 면접을 봐 왔다. 우습지만, 면접관이면서도 나는 '이런 회사에 다니는 사람은 다 엄청 똑똑한 줄 알 텐데, 내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되면 어쩌지'하는 생각을 했다. 겉으로는 표 나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이런 것들은 언제나 내 안에 잠재되어 있던 것들일 뿐, 번아웃의 직접적인 발생요인이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나의 성장과정 및 성향과 더불어, 승진 후에 더해진 책임감과 업무 스트레스, 육아, 가족관계, 친구관계 등 다양한 것들이 2024년 11월 나의 에너지를 모두 앗아가 버렸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그 에너지들을 다 써버렸다고 해야겠지. 누구도 나에게 강요하지 않았으니까. 결국 내가 얼마만큼의 연료가 남았는지도 모르고 최고속도로 나를 몰고 가 버렸으니까.




결국 이러한 이야기 만으로 번아웃의 직접적인 원인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뭐든 끼워 맞추면 그럴듯한 원인이 되어버렸으니까. 그때 사이먼이 한 뭉치의 종이를 가져와 나에게 안겨줬다. '가치 카드 (Values Card)'라고 하는, 공감, 성공, 인정 등과 같은 가치를 나타내는 단어가 적힌 두툼한 카드 더미였다. 사이먼은 우선 이 카드들을 하나씩 넘기면서 내게 가장 중요한 것 (Most Important To Me), 어느 정도 중요한 것 (Somewhat Important To me), 내게 중요하지 않은 것 (Not Important To Me)으로 나누라고 했다. 그리고는 내게 가장 중요한 것들에 놓은 카드들 중에, 지금 내가 이미 충족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 가까이에, 잘 충족이 되지 않다고 생각되는 것은 나에게서 멀리 두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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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여러 세션에 걸쳐 카드를 한 장 한 장 들여다보며, 왜 이 가치가 내게 중요한지, 지금 이 가치가 내 가까이에 있는지 멀리 있는지, 멀리 있다면 어떻게 내 가까이로 가져올 수 있을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번아웃임에도 불구하고 내 가까이에 있다고 생각하는 가치들이 꽤 많았다. 가족, 사랑받는 것, 사랑하는 것, 성취, 성장, 그리고 협동과 같은 가치들이었다. 다행이었다. 물론 번아웃의 요인 중에 가족도 있지만, 믿어주고 응원해 주는 마음이 있기에 흔들리지 않는 가치들이었다. 그리고 회사일로 힘들었지만,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 그리고 좋은 동료들과 함께 있다는 느낌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다. 그럼에도 '도움을 주고 있다는 느낌 (Helpfulness)'은 내 곁에 없었다. 좋은 환경에서 좋은 사람들과 일하고 있으면서도, 내가 과연 이 팀에 도움이 되고 있는지는 의문이었다. 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매주 출장을 가는 아내, 엄마로서 내가 우리 가족에게 도움이 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이와 더불어 나에게서 멀어진 가치들 중 '진정성 (Genuiness)'이 눈에 들어왔다. 어쩌면 오랫동안 외면하려고 했던 마음의 소리.


'나는 진정 나다운 일을 하고 있는가. 과연 나보다 경험도 많고 지식도 많은 사람들에게 냉철한 조언을 해야 하는, 촌각을 다투며 한 기업의 미래를 좌지우지할만한 일들을 다루어 내는 일이 나에게 잘 맞는 일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게 된다면, 이 깜깜한 번아웃 터널에서 나갈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혹시나 도움이 될까 싶어, 내가 사이먼이랑 했던 가치카드 활동을 해볼 수 있는 사이트를 찾아서 첨부해 둡니다. 다 영어라 원래의 저였다면, 열심히 편집해서 한글본으로 예쁘게 만들었을 텐데, 지금은 번아웃이라 에너지가 부족하네요. 추후에 에너지가 조금 차면 해볼까 합니다.

- 사이트에서 바로 마우스로 움직여서 해볼 수 있는 곳 (영어): https://www.valuescardsort.com/

- 출력 가능한 PDF 파일: https://www.motivationalinterviewing.org/sites/default/files/valuescardsort_0.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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