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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엄마의 육아법

‘화’에 대한 고찰

by 달하달하

잦은 출장으로 자주 집을 비우던 엄마가 집에 있으면 아이들이 좋아할 줄 알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엄마라는 사람이 매번 집을 비워 마음이 무거웠는데, 오랜만에 아이들과 충분히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으니 내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질 줄 알았다. 우습게도 이든이는 엄마가 일을 하지 않고 집에만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을 병가 2개월 차 즈음에서야 눈치챘다. 병가 후에도 아빠와 함께 등하교를 하던 아이들인데, 갑작스레 남편에게 야근업무가 생겨 내가 아이들을 데리러 간 날이었다.

"아빠는 뭐 해?"

"아빠 오늘 늦게까지 일하셔야 돼. 그래서 엄마가 왔어."

"아. 어, 근데 엄마는 왜 일 안 해?"

"아, 엄마가 일 안 한지 조금 됐는데 몰랐어? 엄마 일 안 하니까 좋지 않아?"

"뭐...... 엄마가 일 하고 싶으면 하는 거고, 하기 싫으면 안 하는 거지. 나는 엄마가 일하는 거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야?"

흠칫했다. 이든이 눈에는 엄마가 일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보였구나. 그러고 보면 일을 하러 집을 비우기도 하고, 저녁 먹고는 후다닥 올라가서 또 일하는 엄마의 모습이 '일이 좋아서 하는 사람'으로 보였을 수도 있겠다. 사실 재밌고 신나서 일한 적도 없지는 않았으니, 어쩌면 그런 날의 나를 더 선명히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찌 되었든, 아이들이 집에 있는 엄마를 좋아할 것이라는 나의 예상과는 달리, 아이들은 내가 집에 있을 것을 그리 크게 느끼고 있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몸과 마음에 에너지가 떨어지니 인내심이 거의 0에 수렴하는 지경에 이르러, 아이들과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오히려 아이들에게 목소리를 높이는 일이 더 많아졌다. 아이들이 신나서 뛰고 떠드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인데, 소리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내 시야에서 마구 움직이는 모습 자체가 눈의 소음처럼 느껴졌다. 버럭 소리를 지르고 나면, 나 자신에게 화가 나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는 나 스스로에게 난 화를 가라앉히지 못해 아이들을 눈치 보게 만들기 일쑤였다. 나의 화가 집안에 차곡차곡 채워질수록, '화(怒)'에 대한 몇 가지 법칙들이 내 눈에 들어왔다.



'화'의 제1 법칙 | 화는 가만히 두면,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우리가 익히 들어온 '화가 화를 부른다'는 말은 진리였다. 화를 덜 내려고 노력할수록 더 예민해져, '될 대로 돼라' 식으로 마음속에 끓어오르는 화를 있는 그대로 표출했더니, 마음이 시원해지기는커녕, 더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하루는 아무 말도 안 하고 혼자 씩씩거리고 있는데, 말을 하지 않아도 내 안에 화가 점점 커져가는 것이 느껴졌다. 속수무책이었다. '이제껏 어떻게 사회화된 인간처럼 살아온 것일까. 내가 이렇게 화가 많은 사람이었나.'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멈추려고 해도 멈추어지지가 않았다.


'화'의 제2 법칙 | 화는 전염된다.


내가 '버럭'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니, 어느새 남편이 아이들에게 언성을 높이는 일도 잦아졌다. 서로 다투는 일이 있어도 큰소리를 낸 적 없던 우리 부부는, 어느새 작고 약한 아이들에게 순간의 화를 퍼붓기 시작한 것이다. 우스운 것은, 상대방의 화내는 소리에 없던 화도 치민다는 것. 우리는 서로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그리 잘못한 것도 아닌데, 왜 그리 소리를 지르냐'며 핀잔을 주기 시작했다. 사실은 배우자가 아이에게 소리치는 모습에서, 나 또한 그리했던 부끄러운 과거가 떠 올라 뜨끔한 것이면서 우리는 서로 남 탓을 했다.


'화'의 제3 법칙 | 화는 대물림된다.


엄마와 아빠가 자신들에게 소리 높이며 혼내는 모습을 본 아이들이, 서로를 향해 앙칼진 목소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평소 성질을 부리거나 짜증을 내는 아이들이 아니었는데, 신경질을 내며 자기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갑자기 소리를 지르거나, 물건을 집어던지는 일도 생겼다.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단 말인가.' 변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점점 무서워졌다. 내가 내 화를 다스리지 못하면, 우리 아이들은 이렇게 '자기 화를 못 이겨 고통스러워하며 크겠구나' 싶어 무서워졌다.




남편이 먼저 솔루션을 제시했다.

"너무 잘하려고 노력하지 마. 힘들 때는 '엄마가 조금 힘들니까 혼자 있게 해 줄래'하고 이야기해 봐. 아이들도 알아들을 거야."

나는 '4살, 7살 난 아이들이 이 말을 이해할까? 괜히 엄마가 이상해졌다고 불편해하지는 않을까?' 하며 반신반의했지만, 다른 방법이 없기에 아이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시작했다.

"이든아, 이나야, 너무 미안한데, 엄마가 지금은 조금 힘이 없어서 이든이 이나랑 못 놀아줄 것 같아. 엄마 30분만 혼자 있어도 돼?"

"그래!"

세상에나 이렇게 쉽다고. 나는 '왜? 왜 힘이 없어?"하고 물을까 봐 걱정을 했었는데, 아이들은 아주 '쿨'하게 자기들끼리 또 다른 놀잇감을 찾아 떠났다. 가끔은 30분 놀아주고 3시간을 혼자 쉬어야 할 때도 있고, '우리는 엄마가 놀고 싶어, 왜 계속 엄마 혼자 놀아?' 하며 아쉬운 소리를 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이 방법을 사용하며 아이들에게 목소리를 높이는 일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물론 그렇게 아이들에게 부탁할 때마다 마음이 편치는 않다. 하루 종일 집에 있으면서도 아이들을 피해 다니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크다. 그러면 내 방으로 찾아온 아이들을 하나하나 안아주며 말한다.

"이든아, 이나야, 엄마가 많이 못 놀아줘서 미안해. 그런데 그렇다고 엄마가 이든이 이나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야. 이든이 이나 장난감이 배터리가 다 된 것처럼, 엄마도 지금 그래. 그래서 엄마가 혼자 충전할 시간이 필요해."

그리고는 두 팔에 힘을 주어 한번 더 아이들을 '꼬-옥' 안아준다. 그러면 '아야- 아야-'하며 웃으며 내 팔을 뿌리치고는 괜찮다며 내 침대에서 뛰쳐나가 둘이 또 신나게 뛰어논다.





자동차에 이든이를 태우고 슈퍼마켓에 다녀오는 길. 이든이가 물었다.

"엄마, 슬퍼?"

"응? 안 슬픈데, 엄마가 슬퍼 보여?"

"음...... 그런 것 같아."

"아니, 엄마 슬프지 않아. 이든이랑 같이 있어서 좋아. 그런데 엄마가 에너지가 없어서, 힘이 조금 없어서 그렇게 보였나 보다. 엄마 안 슬퍼, 괜찮아."

요즘 이든이의 눈에 엄마는 '슬픈 사람'으로 보이나 보다. 그러고 보면 예전에는 꽤나 잘 웃는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웃는 것이 어색해질 정도로 표정이 없어졌다. 별거 아닌 일에 신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는 나였는데, 요즘에는 그런 감정의 변화가 잘 느껴지지 않는다. 에너지가 고갈된 엄마, 번아웃이 온 엄마가 아이들에게는 어떻게 기억될까. 비록 힘이 빠진 엄마가 잘 놀아주지 않았던 시간을 기억할지라도, 그 시간조차 엄마의 사랑은 부족하지 않았다고 느낄 수 있게, 더 많이 안아주고, 더 자주 사랑한다고 말해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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