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잃을 것들과 잊고 산 것들
한국에서는 대중교통이 잘 되어 있어 딱히 차를 사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가, 독일살이를 시작하면서 장롱면허를 꺼내 운전을 시작했다. 남편이 타던 아주 오래된 고물 소형차를 차다, 처음으로 깨끗하고 큰 기아 중고차를 샀을 때의 기쁨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럼에도 내게 자동차는 그저 교통수단에 불과했다. 9개월짜리 둘째를 두고 컨설팅펌에서 다시 커리어를 이어나가기로 결정할 때, 나는 남편과 하나의 거래를 했다. 나보다 업무시간이 유연한 남편이 아이들을 주로 돌보는 대신, 남편이 내가 회사에서 받게 될 새 차를 타기로. 당시 회사에서는 전 직원들에게 전기차를 적극 권장하던 터였고, 그렇다면 가장 앞선 기술의 전기차를 타고 싶다던 남편은 몇 가지 선택지 중 테슬라를 골랐다.
나는 전기차 자체가 많지 않을 초기였기에 걱정도 많았고, 극 미니멀리즘 인테리어와 장난감 같은 몇몇 기능들에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지만, 쓰면 쓸수록 편리함에 점점 마음이 갔다. 회사에서도 동네에서도 테슬라를 타는 사람이 많지 않던 때라, 사람들의 궁금증을 자극하는 것이 꽤나 재밌기도 했다. 그러다 기존에 있던 기아차를 바꿔야 할 때가 되자, 남편은 편리함과 빠른 출고일을 고려하여 조금 더 큰 기종의 새 테슬라를 선택했고, 나는 자연스레 남편이 타던 테슬라를 물려받게 되었다. 코로나가 끝나고 회사로 출근하는 횟수가 잦아지면서, 나는 차 안에 있는 시간이 점점 많아졌다. 교통이 좋지 않은 벨기에 도심까지 한 시간이 넘는 출근길이었지만, 홀로 차 안에 있는 시간은 언제나 행복했다.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아이들 학교 갈 채비를 돕고 회사로 출근할 때면, 일찍부터 빼곡히 차있는 회의 일정에 숨이 턱 막히다가도, 스포티파이로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차 안 가득 틀어놓으면, 꼭 나 혼자 있는 세상에 있는 듯 숨이 쉬어졌다. 가족들과의 저녁식사 시간에 늦지 않으려 서둘러 차를 몰고 집으로 오는 길도 마찬가지였다. 회사에서 일이 잘 풀리지 않아 머리를 싸매고 있다가도, 차 안에서 고요히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나면, 다시 얼굴에 슬며시 미소를 띠며 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병가로 회사를 떠난 지 6개월이 되자, 인사팀에서 사내규정에 따라 차를 비롯한 몇 가지 직원혜택을 회수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전해왔다. 아주 당연한 조치인데, 나는 당장 차를 반납해야 한다는 사실에 꽤나 깊이 망연자실했다. 그래서 사이먼과의 상담시간, 나는 거의 한 시간을 차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채웠다. 번쩍번쩍한 차나 탐내는 속물처럼 보일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나와 차의 애착관계를 이해해 줘서 고마웠다. 상담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차가운 고철 따위에 감정 이입을 하는 나 자신이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쩌면 '차'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서 보냈던 시간들, 생각들, 감정들을 내가 아직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전히 나 혼자일 수 있었던 곳, 지난 5년 간의 내 커리어를 함께 해 준 나의 공간. 생각해 보면 내가 잃게 되는 것은, 차뿐만 아니었다. 출장 갈 때마다 이용했던 비즈니스 항공권과 기차표, 오성급 호텔, 피트니스 회원권 등등. 그동안 당연하게 이용했던 것들에 안녕을 고하자니 아쉬움이 밀려왔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원래 내 인생에 없던 것들이었고, 나는 이것들을 딱히 바라며 살지도 않았다. 주어져서 썼던 것들 뿐인데, 어느새 그것들의 편리함에 젖어 이렇게 투덜대고 있는 나 자신이 한심해 보였다.
차가 없는 생활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예전 같으면 무조건 운전을 해서 갔을 거리를, 약속시간보다 여유롭게 집을 나서 걸어 다니자니, 매일 보던 동네가 새삼 새롭게 보였다. 동네 큰길 양 옆으로 우뚝 선 나무들, 갓 나온 빵 냄새가 나는 베이커리에 진열된 바게트들, 멋지게 차려입고 브런치를 즐기는 노년의 부부들. 그리고 차로는 다니지 않던 작은 골목들에는 예쁜 상점이나 카페, 작은 벤치가 있는 공원들도 보였다. 차가 없어진 덕에, 시간이 많아진 덕에,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다른 편리함들도 마찬가지였다. 생각보다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들인데, 나는 익숙함에 젖어 그것이 없는 삶으로는 돌아가지 못할 것처럼 쓸데없는 호들갑을 떨었다.
사실 이 이야기는 비단 '나와 테슬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어쩌면 '나와 일'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한 번도 내가 지금의 일을 하게 될 거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어찌어찌 흘러오다 보니 꽤나 괜찮은 회사에서 꽤나 폼나는 일을 하게 된 것인데, 이 것이 없어지면 꼭 내가 사라질 것 같은 생각에 나는 오랫동안 이 일을 놓지 못했다. 번아웃이 오고 나서 조차, 나는 내가 원래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했다. 그냥 '어쩌다' 이 일이 내 업이 되었던 것처럼, '어쩌다' 이 일을 더 이상 못하게 된 것뿐인 말이다. 이제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그럼에도 예전의 나와 완전히 '안녕'을 고하는 데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부디 너무 그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