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오락실 동전 노래방
민지의 생일날이면 초 꺼진 케이크를 앞에 두고 엄마는 어김없이 그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들인 줄로만 알고 애지중지 열 달을 품었는데 낳고 보니 딸이라 미역국도 안 먹고 식음을 전폐한 채 1박 2일을 내리 울었다는 이야기. 먹은 게 없어 모유가 돌지 않는데도 악착같이 파고들며 젖을 찾는 아기가 얄미로워서 주먹만 한 머리통을 한 대 콩 쥐어박았다는 이야기. 아기 이름도 태어날 아들을 위해 '민재'로만 지어놨는데 딸이길래 급하게 '민지'로 바꿨다는 이야기.
웃지도 않고. 매년. 초를 막 끈 케이크 앞에서.
어릴 땐 그 이야길 들으면 꼭 잘못한 것도 없이 잘못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왜 하필 딸로 태어나서 엄마를 슬프게 했을까. 아들로 태어났다면 엄마를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었을 텐데. 크고 나니 그 이야기를 들으면 도리어 화가 났다. 성별은커녕, 태어나는 것조차 아무것도 내가 선택한 게 없는데. 나 아닌 다른 누군가의 잘못으로 반이 단체기합을 받을 때와 비슷한 분노가 치밀었다. 그렇다면 누구의 잘못인가. 골똘히 생각해봐도 거기까진 답을 찾지 못했다. 아무 대꾸 못하고 하늘로 길게 길게 솟아올라가는 초의 연기를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생일마다 축하로 포장된 커다란 원망을 선물 받는 것만 같았다.
그날은 민지의 열여섯 번째 생일날 아침이었다. 민지는 가족 중 누구와도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평소보다 일찍 집에서 나왔다. 어둑한 새벽길을 헤치고 기어이 학교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현실과 꿈속을 오가며 꾸벅꾸벅 졸다가 내릴 정류장 직전에 잠이 깨어 부리나케 벨을 누르고 뛰어내렸다. 저어기 먼발치,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정문 옆 담벼락 앞에 아이들 여럿이 서서 뭔가를 하고 있는 게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호기심을 거두고 잠이 묻은 눈을 비비며 느적느적 걸어가는데 그 무리 중 한 명이 잽싸게 민지에게 다가왔다.
"저어, 안녕하세요. 오늘이 진우 오빠 생일이거든요. 축하해주세요."
민지의 손에 조그마한 사탕 꾸러미를 건넨 그 아이는 다시 담벼락 쪽으로 뛰어가 바지런하게 움직였다. 벽에는 [태어나줘서 고마워. 오.진.우.]라고 프린트된 노란색 A4용지들이 줄줄이 붙는 중이었다. 민지 손에 쥐어진 사탕 꾸러미 안에도 같은 글귀가 적힌 노란 종이 띠가 레몬맛 추파춥스, 레몬맛 선키스트 사탕, 레몬맛 새콤달콤과 함께 들어있었다. 태어나줘서 고맙다니. 저렇게 순수하고 맹목적인 축하를 받는 생일도, 이 세상엔 있구나. 사탕을 입 안에서 천천히 녹여먹고 있자니 TV에서밖에 본 적 없는 그가 한편으로 부럽기도, 한편으로 밉기도 했다. 시큼한 맛이 다 사라지고 나서도 그 마음은 녹기는커녕 오히려 큼직하게 덩어리 지고 있었다.
하굣길, 민지는 좌우를 살피다가 보는 눈이 없을 때 정문 바로 옆에 붙은 노란색 종이를 하나 떼어 바닥에 버렸다. 속이 찌르르했다. 이내 그 옆에 붙은 종이를 두어 장 더 떼어 구겨서 가방 속에 넣었다. 학원에 가야 할 시간이었지만 정반대 방향인, 인계동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골목 입구에 자리한 월드컵 오락실로 직행했다.
오락실 한쪽 구석에는 동전을 넣으면 노래를 할 수 있는 오락실 노래방, 일명 오래방 부스가 두 개 있었다. 민지는 빈 부스로 들어가 앉았다. 가방 속에 구겨 넣은 노란색 종이 뭉치를 꺼내 작게 작게 찢어 조각을 낸 다음 주머니를 뒤져 오백 원짜리 세 개를 찾아냈다.
짤랑, 짤랑, 짤랑.
제일 자신 있는 노래 다섯 곡을 신중하게 예약하고 마이크를 잡았다. “와아우, 가수로 데뷔하셔도 되겠어요!” “정말 멋진데요? 훌륭한 노래솜씨군요!” “축하해요! 실력 최고였어요!” 노래 한 곡을 마칠 때마다 기계 너머 잔뜩 벅찬 목소리가 민지만을 위한 축복의 말들을 쏟아냈다. 팡파레가 울려 퍼지는 소리에 맞춰 민지는 준비해 둔 노란 꽃가루를 공중에 높이 높이 흩뿌렸다. 노래 다섯 개를 다 하고 어두웠던 부스의 불이 밝아지자 종이조각들로 엉망이 된 바닥이 훤히 드러났다. 민지는 짧은 한숨을 쉬고 바닥을 치웠다.
학원 끝나는 시간에 얼추 맞추어 집에 돌아가니, 엄마는 안방에, 언니는 언니 방에, 아빠는 집에 없었다. 조용히 제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옷을 갈아입으려는데, 민지의 방문을 빼꼼 열고 언니가 들어왔다. 언니 손에는 초를 켠 작은 케이크가 하나 들려있었다. 그것도, 민지가 가장 좋아하는 과자점의 진득한 초콜릿 케이크가.
“조민지. 생일 축하!”
“언니이...”
현실인지 꿈인지 또 한 번 아득해지려는 찰나, 눈물이 그렁해지려는 민지의 코에 언니는 손가락으로 초콜릿 크림을 폭 찍어 묻히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태어나줘서 고맙다. 내 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