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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든 Jun 24. 2018

개인의 취향

사실은 영원할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도 요즘엔 그냥 쉬운 게 좋아

하긴 그래도 여전히 코린 음악은 좋더라

핫 핑크보다 진한 보라색을 더 좋아해

또 뭐더라 단추 있는 파자마, 립스틱, 좀 짓궂은 장난들


- 아이유 '팔레트' 중


런던에서의 옷차림이 가벼워졌다. 땀이 날 정도로 덥다가도 하루 사이에 반팔을 입기엔 쌀쌀한 날씨로 변하기는 하나 두꺼운 외투나 목도리는 더 이상 찾지 않게 되는 딱 그 정도. 옷걸이에 걸어 보관해야 하는 옷의 양에 비해 내 방의 옷장은 옷을 걸 수 있는 행거의 폭이 그렇게 넓지 않아서 당분간 입지 않을 옷은 차곡차곡 개어서 쌓거나 말아서 보관해야 한다. 얼마 전에 바쁘다는 핑계로 마른 옷을 마구 집어넣었던 옷장의 옷을 꺼내 정리했다. 지난가을부터 겨울까지, 추운 날씨에 필요해서 고른 상의를 보니 놀랍게도 상당수가 롤넥 스타일이었다. 하나씩 그것들을 접는데 괜스레 머쓱해졌다. 내가 예전에 누군가에게 말했던 것이 생각이 났기 때문에.


아마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옷에 관련된 주제로 자연스럽게 넘어갔던 것 같다. 목부분을 접어 입는 상의에 대한 이야기가 툭하고 나왔고 나는 '어휴, 그런 건 답답해서 못 입겠더라'라는 식으로 말한 것이 기억이 난다. 실제로 그러했다. 유치원을 다니던 시절, 엄마가 억지로 입혀서 몇 번 입은 것은 빼고 초등학생 때부터 작년까지 단 한 번도 그런 디자인을 사본 적이 없고 옷을 사러 매장에 가도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러다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정말 우연히 하얀색 롤넥 스웨터를 입어보았는데 생각보다 목이 따끔따끔하지도, 못 견딜 정도로 불편하지도 않았다. 찬 바람을 막기 위해 목도리를 걸치지 않아도 되니 실용적이었고 왜 여태껏 입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만의 꽤 근사한 멋이 있었다.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어색했지만 싫지 않았다. 그렇게 내 옷장에 혜성처럼 등장한 롤넥 스웨터에게 현재는 더 많은 친구들이 생겼다.  


과거와는 불일치된 언변으로 약간은 머쓱해지는 취향의 변화를 한 가지 더 고백해본다. 내 방의 천장 등을 켜지 않은지 꽤 되었다. 지금은 그 대신 작은 조명들로 방을 밝힌다. 저녁에 집에 돌아와 문을 열고 방문 바로 앞 조명부터 가장 멀리 있는 책상의 스탠드까지 하나 둘 스위치를 누르면 따뜻한 색감의 빛이 바닥에서 천장까지 금방 차오른다. 아득하다.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나만의 공간에 들어왔다는 실감이 난다. 쨍한 백색의 형광등이 아닌 노란 색의 백열등으로 금세 눈이 침침해졌던 런던에서의 첫 날밤이 기억난다. '영국에서 사니 어때?'라고 물어온 몇 명의 지인들에게 '왜 영국 사람들은 어두컴컴한 동굴 같은 집에 사는지 이해할 수 없어'라는 불평 섞인 푸념을 한 기억도 난다. 이후에 이사 간 집도, 그다음 집도, 시간이 흘러 이제 일 년에 한두 번씩 한국 집으로 돌아갈 때면 온 사방의 형광등 불빛에 오히려 어색함을 느낀다. 같은 사물도 형광불빛 아래서는 다르게 보인다. 예전에 어떤 건축가가 쓴 책을 읽다가 이런 내용을 발견했다. 한국의 현대 주택은 빛을 위에서 아래로 비추는 직접 조명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여러 개의 광원의 간접 조명으로 꾸민 서양의 주택보다는 눈의 피로도는 더하고 집에 머물 때의 편안함은 덜하다는. 그의 말처럼 나는 백열등 예찬론자가 되어버렸다. 


영원히 변치 않을 것 같았던 취향은 어느 순간 갑자기 혹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변하기도 한다. 예전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것들에 갑자기 관심이 생기고 좋아졌다든지 혹은 열렬히 사랑했던 것들이 지금은 좀 시시해 보이고 어쩌면 그런 것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까마득하게 잊힌 무언가 들. 타인의 취향은 순식간에 바뀌는 유행처럼 변덕스러울지다로 나의 취향은 우뚝 선 태산처럼 변하지 않을 줄 알았다. 나 자신은 확고할 뿐만 아니라 분명하고 완전한 존재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진짜 나는 쉽게 흔들리고 모호하며 너무나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것을 종종 느낀다. 또한, 나의 취향들이 어떤 특정한 사건과 이유를 통해 자연스럽게 형성된 산물이 아닌 낯설거나, 해보지 않아서, 혹은 주변인에게 들은 말로 인해 덩달아 호와 불호를 판단하게 된 것이 취향으로 자리 잡은 건 아닐까. 혹시나 누군가 나에게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오면 이렇게 대답해 볼 생각이다. "지금은 이게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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