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자유대학교 한국학연구소 이은정 교수 인터뷰
‘한 사람을 이해하는 것은 우주를 이해하는 것과 같다.’고 이야기한다. 하물며 한 명의 사람을 이해하는 것도 이처럼 복잡한데, 한 나라를 이해한다는 것은 매우 다양하고, 중층적이며 통합적인 일이다. 이를 문화가 다른 나라에 전달하고, 연구의 바탕을 만드는 일이라면 더욱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서독과 동독의 장벽이 있던 베를린에 한국을 연구하는 베를린 자유대학교 한국학 연구소가 있다. 2008년 스무 명으로 시작했던 학생이 2018년 200이 되었고 한국학에 대한 관심도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이렇게 꾸준하게 유의미한 성과를 내며 발전한 한국학 연구소의 중심에는 호기심을 원천으로 연구의 열정을 이어나가는 이은정 교수가 있다.
이은정 교수가 독일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35년 전 1984년이다. 정치학을 공부하기 위해 분단된 독일을 찾았다. 독일에 대한 첫인상이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공부를 빠르게 마치고자 하는 일념뿐 이었다. 베를린에 가게 된 것은 10년 전이다. 독일은 유럽의 학문 분위기를 반영하는 대표 주자로 한국 관련 연구기관이 유럽 내에서 많은 편이다. 베를린 자유대학교, 함부르크 대학교 등 전통적인 아시아학 연구처를 중심으로 한국어, 역사 등의 학문 연구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학과가 설립되기 전에는 독립된 학과로 개설되어 있지 않았다. 이 교수는 펀딩 다이렉터로 베를린 자유대학교 한국학과를 설립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2018년은 베를린 자유대학교 한국학 연구소가 설립된 지 10년이 되는 해였다. 10년 동안 한국 사회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아시아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한류 문화는 서구 지역으로 이어졌고, 한국은 전에 비해 낯설지만 매력적인 콘텐츠가 되었다. 이 교수는 그 10년의 시간을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일이었다고 설명했다.
“제로에서 시작한 일이었어요. 교육 과정의 전반을 모두 만들어야 했으니까요. 그래도 학과를 만들어서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은 생각보다 빨리 진행 돼요. 하지만 무엇보다 어려웠던 것은 사람을 키우는 일이에요. 학사로 시작해서 혼자 설 수 있는 학자를 만들기까지 10년이 넘게 걸려요. 외국에서 한국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두 가지 과제를 해결해야 해요. 하나는 언어, 다른 하나는 전공 학문이죠. 언어를 모르면서 한국을 연구할 수는 없어요. 그런데 언어만 한다고 해서 한국을 연구할 수 있는 방법을 아는 것도 아니죠. 정치학적 접근을 하든지, 경제학적 접근을 하든지… 자신의 전문 영역에 대한 훈련을 같이 해야 하는 것이죠.”
10년의 시간 동안 학생들도 많이 늘어나고, 여러 성과를 만들어 가고 있지만 한국학은 한국에서도 생소한 학문이다. 잘 모르거나 한국학이 한국을 홍보하는 일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한국을 공부한다고 하면 많은 분들이 한국의 좋은 것들을 외국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한국학은 지역학으로서의 학문이죠. 학문은 좋은 것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에 대해서 분석할 수 있는 훈련과 비교할 수 있는 훈련을 하고 이를 통해 한국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죠. 한국을 이해하는 것과 홍보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에요. 베를린 자유대 한국학 연구소의 경우 연구소장인 제가 정치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정치 분야가 강하지만 수업 커리큘럼을 보면 정치, 역사, 문화, 사상, 국제관계 등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공부하는 분야가 다양하고, 학생들 논문의 주제도 다양해요.”
베를린은 남한과 북한의 대사관이 모두 있는 곳이다. 남북이 직접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는 곳이 베를린인 것이다. 이러한 장소적 특성 때문에 연구소에서는 남북과 관련된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얼마 전 진행된 남북영화 학술회도 이와 같은 선상에서 진행됐다. 이는 베를린이라는 곳의 특성을 연구소에서 반영하고자 하는 노력의 결과이다. 이 교수는 베를린이 유럽 정치 내에서 갖는 큰 비중을 고려하여 유럽 내에서 한반도 문제를 제대로 알리는 활동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한 문화행사보다는 정치적 성격을 갖는 국제 정치, 안보에 관련된 행사를 많이 추진하고 있다. 학문의 범주도 넓은데다가 여러 활동까지. 많은 일을 수행하고 있는 연구소이다.
“한국학과를 운영하고 한국학을 연구한다는 것은 올라운드 플레이어가 되어야 하는 일이에요. 한국 철학, 사상, 역사, 정치, 경제까지. 한국에 관한 모든 것을 다뤄야 하고 남한 뿐 만 아니라 북한에 대한 연구도 해야 하죠.”
연구소는 김일성대학과 교류 협력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서로 주최하는 컨퍼런스에 참여하고 학생 교류 등으로 진행되던 교류 관계를 정착시킨 것이다. 이 교수가 북한에 방문한 것은 2012년 북한의 서원 연구를 진행하면서다. 베를린 자유대는 고대부터 전근대까지 인류 문명 속에서 지식이 어떻게 변화했는지에 대해 연구하는 대형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연구소는 그 틀에서 16세기 중반부터 18세기 중반까지 200년 동안 서원이라는 지식 기구가 어떻게 전파되었고 변화되었는지 연구해왔다. 그리고 서원에 대한 연구가 한반도 전체로 완성될 수 있도록 북한 서원 연구를 시작했다.
“북한 서원을 방문했을 때 보존이 너무 잘 되어 있어 전율이 느껴질 정도였어요. 보통 서원 사당에만 단청 채색이 되어있는 것과는 달리 다른 건물도 채색이 잘 되어 있어 실제 원형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보존이 잘 되어 있었어요. 특히 율곡선생을 모신 소현 서원의 사당의 경우에는 오랜 세월을 보낸 단청이 너무 아름다웠어요.”
소현 서원은 율곡이 노래한 고산구곡가의 무대인 석담계곡이 있는 황해도 벽성군 석담에 위치해있다.
1950년대 김일성이 서원을 방문하고 역사 문화 유적을 잘 보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북한의 서원은 보존이 잘 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이은정 교수는 평양 근처의 보현사를 방문했을 때 서원뿐만 아니라 사찰도 보존이 잘 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개성 역사지구 역시 보존이 잘 되어 있다. 유적지를 다양하게 활용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특히 소현 서원의 경우 북한의 역사 영화를 찍는 무대가 되었다. 안동에 가면 문화 해설사를 볼 수 있듯이 북한 역시 해설사가 해설을 해주거나, 붓글씨 써보기 등 문화 체험도 할 수 있다.
독일의 학자로서 방문한 북한이지만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세차게 찾아올 때가 있었다.
“독일 정부 대표단의 일원으로 간 것인데 순간 눈물이 왈칵할 때가 있었어요. 학문적인 호기심으로 북한을 보기도 하지만 그런 호기심을 넘어선 감정이 들 때가 있어요. 처음에는 누가 누군지 모르지만 일주일 동안 같이 다니면서 사람을 알게 되는데 ‘내가 이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여기를 또다시 올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독일로 돌아올 때 다들 정신없이 공항에서 비행기를 탈 때 저는 탁 돌아서는데 마치 처음 유학을 떠날 때와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돌아서면서 눈물이 확 쏟아졌죠.”
독일에 도착한 후 한동안 앓아누웠다. 마음이 너무 아팠고, 몸도 아픈 시간을 보냈다. 그런 이 교수를 보며 연세 많은 선생님이 ‘너도 한국 사람이구나’라며 북한을 다녀온 많은 이들이 비슷한 경험을 한다고 전했다. 오랫동안 한국을 떠나와 독일에 있었지만, 이 교수도 민족의 아픔을 오롯이 느낀 것이다.
작년 10월 한국학 연구소는 건물을 이전했다. 이전 건물 정원에는 작은 장승이 한국학 연구소임을 상징했다. 하지만 건물을 이전하면서 건물도, 정원도 규모가 커졌기 때문에 고민이 시작됐다. 그림을 그려가면서 이 공간에 가장 어울릴 것을 찾다 정원을 지어야겠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베를린 시내 포츠담에 정자가 있지만 중국집이 아니냐는 이야기를 많이 하기에 이 교수는 이번에는 제대로 된 정자를 지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여러 방면으로 방법을 고안하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전시되었던 정자를 발견했다. 월간한옥이 2017년 프랑크푸르트 수공예박물관에서 전시 한 정자였다. 그렇게 두 달 만에 전통 정자가 한국학 연구소 정원의 공간을 완성했다.
“기적 같은 일이었어요. 독일 식의 행정절차로는 절대로 될 수 없는 일이었죠. 그렇게 빨리 건축 허가가 날 수도 없고, 그렇게 빨리 기단을 공사할 수도 없는 것인데 그게 이뤄졌죠. 이 정자가 꼭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을 저지른 것인데 월간한옥이 도움을 줬고, 아모레퍼시픽의 후원이 있어 실현됐어요. 정자가 완성된 지 석 달이 채 안 되었는데 벌써 우리 지역에 많이 알려졌어요. 직접 보니까 중국이나 일본과 다른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을 다들 느껴요. ‘이런 게 한국적인 것이구나’ 하고요.”
연구소를 이전하는 날 남북 대사가 참여한 상량식과 위령제가 진행됐다. 연구소의 새 건물은 1927년에 요아힘 손 씨가 자신의 가족을 위해 지은 건물이다. 유대인인 요아힘 손 씨 부부는 아우슈비츠로 보내지기 전 1943년 3월에 자살했다. 새 건물을 사용하기에 앞서 이 부부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위령제를 지냈다.
“이 건물이 정말 예쁜 집이에요. 집을 지은 주인이 가족을 위해 얼마나 작은 부분까지 신경을 썼는지 느껴질 정도로 굉장히 신경을 많이 쓴 집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지은 집에 십 년을 채 살지 못하고 집을 빼앗기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어요. 이 집에 들어가기 전에 이 공간을 만들어 준 것에 대해 감사하고, 또 안타까운 영혼을 위로해줘야겠다 싶었어요.”
위령제는 불교 의식으로 진행됐다. 하지만 종교와 상관없이 기독교에 익숙한 독일인들에게도 감동을 주었다. 한국의 전통 방식이지만, 제사상에는 유대인이 먹는 음식을 올렸다. 학생들이 직접 유대 빵집에 가서 사온 빵이었다. 문화는 다르지만 모두가 한마음으로 영혼을 위로했다.
한국학 교수인 그에게 많은 이들이 한국의 정체성에 대한 생각을 묻는다. 하지만 이 교수는 한국의 정체성을 규정하려 하지 않는다.
“학생들에게도 ‘한국은 어떠하다’는 규정은 절대 못하게 해요. 많은 분들이 한반도 전체를 하나로 이해하려고 하는데, 정체성은 굉장히 다양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오히려 다원적인 정체성, 레이어드 된 중층적인 정체성을 알아야 한다고 하죠. 어떻게 변해왔는지, 얼마나 다이내믹한 사회인지. 정치적인 긴장관계와 여러 종교가 섞이면서 만들어진 역동성. 오히려 이러한 역동성 때문에 지금의 한국이 만들어진 것이죠.”
독일에 한국을 전달하는 일을 하는 만큼, 한국에 독일을 전달하는 것 역시 이 교수의 역할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신을 ‘한국과 독일 사이의 중첩’이자 ‘문화 번역자’라고 표현한다. 서로가 이해할 수 있도록 문화를 번역하는 일은 창조적인 작업이지만 동시에 학문적으로도 많은 고민이 필요한 일이라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학을 공부하는 후진 학자들에게 무엇 때문에 이 자리에 있고 싶은지 깊은 고민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또한 국제 학계에서 한국학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역할을 하도록 요구한다. 그 자리까지 가기에는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정말 많아요. 유럽 전체 속에서 네트워크를 강화시켜 가면서 유럽 내에서 한국 연구가 더욱 활발히 이뤄지도록 해야 해요. 또 다른 학문 영역에서도 한국에 대한 더욱 심화된 연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을 많이 해야 해요. 무엇보다 학자들이 많아지는 것이 가장 중요하죠. 그래서 저희가 이렇게 투자를 하는 것이고요. 유럽에서는 단순히 광고를 한다고 해서 한 나라에 대한 호감을 갖거나 하지 않아요. 지적인 호기심을 갖게 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에요. 우리나라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채워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안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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