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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한 번만, 나를 안아주세요

루이즈 브루주아의 작품 < 두 사람>

by 미유

1. 루이즈 브루주아 <그냥, 나를 안아주세요>

https://youtu.be/Hp5T39c2qbo?si=b995GN9X9ZnXok6z


며칠 전 우연히 이 짧은 영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영상 속에서는 한 중년 남자분이 지하철 역사 안에서 취한 채로 소동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남성 분은 격앙된 모습으로 출동한 경찰분에게 몸을 들이밀며 큰 소리로 항의를 하고 있었고, 경찰은 그분을 진정시키려 노력하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종종 목격하곤 하는, 그저 빨리 해결되기를 바라는 그런 종류의 소란이었지요.


그런데 제가 깜짝 놀란 것은 바로 다음 장면이었습니다. 역사 안 의자에 앉아있던 한 청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어요. 그리고는 저벅저벅 걸어오더니 그 남성 분을 안아 양손으로 그분의 등을 토닥이는 것이 아니겠어요? 아마 그 이전부터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것 같았어요. 그리고 그 포옹은, 짜증이나 과격함이 전혀 묻지 않아 마치 아이를 어르는 듯한 따뜻하고 든든한 그런 포옹이었습니다.


청년이 남성 분을 그러안으며 등을 몇 번 두드리자마자 곧 흑, 하는 짧은 울먹임과 함께 남성 분은 청년의 어깨에 머리를 묻었습니다. 몇 초 전까지 고함을 지르던 남성 분의 고성은 곧 목이 메인 작은 흐느낌과 함께 조금씩 잦아들었고요.


청년은 그때 그 중년 남성분의 모습에서 무엇을 봤던 걸까요?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그런 용기 있는 포옹을 할 수 있었던 걸까요. 그저 따뜻한 두드림, 이유를 추궁하지 않는 토닥임 한 번이 바로 그 순간에 그 남자분에게 절실했음을 어떻게 알아보았던 걸까요.


그날 이 영상을 보며 저에게는 문득 한 현대미술작가의 작품이 떠올랐는데요. 바로 '루이즈 부르주아'의 작품입니다. 루이즈 브루주아의 이름은 처음 들었어도 그녀의 작품은 아마 한 번쯤 보신 분들이 더 많을 거예요. 리움 미술관 앞에 한때 놓여있던 이 거미 작품을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마망>이라는 제목의 이 작품이 루이즈 부르주아의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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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루이즈 브루주아를 여러 이유로 참 좋아합니다. 루이즈 브루주아의 다층적인 의미를 가진 작품도 좋아하고, 그녀가 유년 시절 삶의 아픔을 예술로 아름답게 승화시켜 낸 것도 좋아합니다. 또 그녀가 97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왕성하게 예술혼을 불태운 멋진 할머니 작가였다는 사실도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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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또한 브루주아의 대표작인 <마망>으로 그녀를 알게 되었지만, 그녀의 다른 작품들을 알아갈수록 점점 더 매력적인 예술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브루주아를 통해서 회화가 아닌 조형 작품의 매력을 알게 되었거든요. 작품 <두 사람>또한 제가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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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에 두 사람이 매달려 있는 모습입니다. 서로를 마주한 채, 온몸을 최대한 서로에게 맞붙이려는 듯한 깊은 포옹을 하고 있어요. 머리를 서로의 어깨에 편히 기대고, 두 팔은 서로의 허리를 그러안고, 발도 서로의 발을 포개올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끌어안는 그런 포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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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보면 이 작품의 재질은 살구색의 수건 재질인데요. 분홍빛을 띤 살구색은 마치 따뜻한 엄마의 자궁 속을 떠올리고, 또 수건의 보드라운 느낌은 우리가 누군가에게 안길 때의 그 포근한 감각을 더 극대화해 느낄 수 있게 해 줍니다.


상대를 안는다는 것, 그 온몸 전부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얼은 얼마나 따뜻한 일인가요? 생각해 보면 스킨십 중에 포옹만큼 상대를 깊이 수용하는 행위가 없는 것 같습니다. 악수는 단단한 신뢰를 의미면서도 조금 더 예의를 차린 느낌이고, 키스는 욕망으로 서로를 탐닉하는 행위에 가깝게 느껴집니다. 가벼운 뽀뽀도 좋지만, 아주 가까운 사람이 아니면 함부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포옹은 남녀노소를 넘어서 누구와도 할 수 있는 행위지요.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준비만 되어 있다면요.


메를로 퐁티라는 철학가는 <지각의 현상화>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을 썼습니다.


"접촉한다는 것은 관계에 들어서는 것이다. 같은 살을 통해 타인의 존재를 느끼는 것은 곧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현존할 수 있도록 해주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존재의 상호적인 얽힘이다."


그는 신체적 접촉을 단순한 물리적 행위가 아니라, 타인과 존재를 공유하는 경험으로 보았던 겁니다. "상호적인 얽힘"이라는 표현은, 접촉이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함께 엮어나가는 관계적 행위임을 강조한 의미인 것이죠.


아마 그날 청년도 중년 남성의 모습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그를 안음으로써, 그리고 남성 또한 그 포옹을 받아들임으로써 그 순간만큼은 서로의 존재를 깊이 공유하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더 크고 시끄러운 난동으로 끝날 수도 있었던 그날의 일이 그렇게 마무리된 것이, 이렇게 제게 잔상을 남기는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날 그 중년 남성 분의 행동은 분명 잘못된 행동이었지요. 하지만 살다 보면 도저히 제정신으로 버틸 수 없는 그런 날이 있다는 것 또한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 소란을 피운 남성 분께도 모든 것이 지옥 같던 최악의 하루, 절대로 평소의 자신다울 수 없었던 절망적인 인생의 단 하루는 아니었을까요. 때로는 이유를 묻지 않는 인간적이고 따뜻한 포옹 한 번이 우리를 나아갈 수 있게 해 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해하고 싶지 않다. 나는 그저 품에 꽉 안기고 싶다.
-루이즈 브루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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