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9호선 개화행 열차. 부녀가 내 옆자리에 앉았다.
지하철 9호선 개화행 열차. 부녀가 내 옆자리에 앉았다.
어린 딸이 어린 목소리로 불쑥 아빠에게 묻는다. “아빠, 아빠는 7살로 돌아가면 뭐하고 싶어? 무슨 일을 할 거야?” 아빠는 답한다. (진지하게 고민한 답이라기보다 딸에게 권하고 싶은 말인 양) “공부를 열심히 할 거야.” 그리고 앞선 내 짐작을 뒷받침하듯 곧바로 되묻는다. “너는 지금의 네가 미래에서 과거로 온 거라고 생각해봐. 아까처럼 계속 엄마 아빠한테 떼쓰고 싶어?” 딸은 당연하다는 듯 말한다.
“응!”
나는 이때부터 가만히 에어팟을 빼고 왼쪽 귀로 들려오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얼마간의 침묵이 이어졌을까, 아이는 갑자기 두 팔로 자신을 감싸더니 오들오들 떠는 제스처를 취한다. 아빠는 당황하여 왜 그러느냐고 묻는다. 에어컨의 냉방이 강해서 실은 나도 좀 추웠던 참이었다. 그러나 아이는 뜻밖의 대답을 한다.
“불행이 찾아올까 봐 무서워서. 불행이 다가오는 걸 준비하고 있는 거야.”
이 대목에서 의외로, 아빠는 조금도 아이를 비웃거나 당황해하지 않고 물어본다.
“불행이 뭔데?”
“무서운 거.”
“그게 불행이야?”
“아이참……. 아빠, 불행엔 뜻이 많아. 불안한 거랑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뭐라고 정확히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지금 불행이 오는 걸 느낄 수 있어.”
그러자 아빠는 “행복하지 않은 게 불행이지.”라고 불행(과 행복)을 손쉽게 정의하면서 불행에 대한 아이의 호기심을 묻어두지만, 그 사이 화제를 전환한 아이의 시시콜콜한 이야기에 조금은 피곤이 묻어 있는 목소리로 다시금 성실히 대꾸하기 시작한다.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미취학 아동이 지하철에서 느꼈던 불행은 무엇이었을까? 정말로 불행이 도착하는 중이었다면 이 부녀의 대화를 엿듣고 달아나버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대화는 불행이 끼어들 틈 없이 아주 오래 이어졌으니까.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한, 아주 어린 시절의 나도 아빠와 대화하는 걸 좋아하는 아이였다. 그건 아빠가 나를 좀 성가셔했을지언정 한 번도 내 말을 끊지 않은 덕분이리라. 그렇게 나는 나보다 서른 살은 더 많은 어른이 불시에 내비칠지도 모르는 무안이나 핀잔의 기운 같은 것은 꿈에도 느끼지 못한 채, 꼭 지하철의 그 아이처럼 불행이니 행복이니 하는 것을 마치 다 안다는 듯 떠들어댔을 것이다.
이제 내겐 시간을 보답해야 할 차례가 온 것 같다. 아빠의 말을 끊지 않는 자식으로, 허투루 듣지 않고 적절히 맞장구치는 자식으로 말이다. 아무래도 아빠의 노년에 불행보다 행복이 자주 찾아오게 할 순 없겠지만, 가능한 한 불행이 가까이 오다가도 저만치 달아나버리도록 시간을 끄는 일은 할 수 있으리라. 그의 앞에 앉아 무엇이든 귀 기울여주는 방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