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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은 Aug 27. 2019

The record #21_일기와 초고

하마터면 오늘의 일기를 이렇게 끝낼 뻔했다.

@라비브북스

[중고책 네 권을 판 돈으로 생리대 두 팩을 샀다. 딱 커피 한 잔 마실 수 있는 돈이 남았다. 동네책방으로 향하는 가벼운 발걸음. 아직 낮엔 좀 덥구나. 집에갈 땐 오랜만에 자전거를 타야지. 모처럼 마음에 드는 하루를 보내고 있다.]


하마터면 오늘의 일기를 이렇게 끝낼 뻔했다.


나에겐 각자의 일기를 몰래 버리듯 두고 가면 제 일기를 버리러 왔다가 남의 일기를 다정히 읽게 만드는 귀엽고 따뜻한 단톡방이 있다. 오늘 일찍부터 마음이 좀 들떠서 네시 쯤에 위와 같은 일기를 남기고 하루를 일찍 마감하려 했다.


시간 차를 둔 채 하루에 두 개의 일기를 남긴 사람은 그동안 아무도 없었으므로, 나의 하루는 여덟 시간이 더 남은 것과는 무관하게 대낮에 끝난 셈이었다. (그래서 보통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이 단톡방에 들어간다. 오늘은 좀 이례적인 기록이다.) 덕분에 일기는 적어도 저녁 8시는 지나서 써야 한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다시 쓴 일기는 이렇다.


[중고책 네 권을 판 돈으로 생리대 두 팩을 샀다. 딱 커피 한 잔 마실 수 있는 돈이 남았다. 동네책방으로 향하는 가벼운 발걸음. 아직 낮엔 좀 덥구나. 집에갈 땐 오랜만에 자전거를 타야지. 모처럼 마음에 드는 하루를 보내고 있다.


오늘 지갑에 들어온 현금은 이미 알뜰하게 다 썼지만, 책을 집중해서 읽다 보니 커피를 천천히 마시게 됐고 아까 카운터에서 주문할까 망설였던 당근 케이크가 당연한 수순처럼 다시 먹고 싶어졌다. 카드를 꺼내 들고 이내 안 먹었다면 후회했을 뻔한 케이크를 행복하게 먹었다.


‘행복과 문학이 양립할 수 없는 거라면, 나는 행복의 뒷모습을 배웅하면서, 문학 쪽에 서 있을 거다’라고 말하는 시인의 산문집을 필사하며 월요일의 시침을 느리게 맞췄다. 오늘은 아마 8월 중 가장 느리게 흘러간 하루로 기억되겠지.


필사를 하는 사이 맞은편 상점에 조명이 켜졌다. 이곳도 밖에서 보면 은은하게 빛나고 있을 것이다. 마침 퇴근을 한 동네친구가 연락이 왔다. 불과 일주일 전에 그 친구와 함께 이 책방에 왔는데, 친구는 너무 오래 연락을 안 한 것 같다며 건강히 잘 지내고 있느냐고 물었다. 고마워서 맥주를 사고 싶어졌다.


친구와 전화를 끊고는 왠지 용기가 생겨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는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는데, 나는 조금 망설이다 요즘 그에게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조심조심 전했다. 아빠는 결국 모든 게 환멸스럽다는 듯 대꾸했지만 우선 내 이야기를 잠자코 들어주었다. 그거면 됐다. 아직 그의 듣는 귀가 나에게로 열려 있다는 것. 나는 아빠의 남은 밤에 안부를 더했고 아빠는 맥주라도 한 캔 마시고 들어가라고 했다.


지금은 친구의 운동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자전거를 타고 우리 지역의 주민들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체육센터로 가면 낮에 쓴 일기의 마지막 문장이 마침내 실현될 테다. 아, 일기에도 초고가 있을 수 있구나. 두 번째 일기는 이 한 문장을 얻기 위해 쓰여진지도 모른다.]

.

.

.

여기까지 쓰고 그만 일어나려는데, 책장 한 켠에 샘플만 남은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와 예약을 해두었다. 책을 팔고 다시 책을 사고, 맥주를 마시다 들어가는 하루가 되겠다. 이제 진짜 자전거를 타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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