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지불식간에 스며드는 것
많은 일이 나도 모르게 시작되죠
얼마전 재개봉한 영화 <화양연화 : 리마스터링>을 보면서, 나는 뜬금 없이 아름다움이 주는 힘에 대해 재차 생각하게 되었다. 명성에 이끌려 맨 처음 이 영화를 본 것은 고등학생 때. 영화의 관능과 미묘한 긴장감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렸다는 생각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뇌리에 오래도록 남은 것은 화면의 구도와 색감, 장만옥의 몸을 빈틈없이 감싸던 깃이 유난히 높은 치파오(이 영화를 위해 수십벌을 맞춤 제작하였다고 한다) 매 컷마다 집요할 정도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영상미 같은 것들이었다. 당시 나에게 화양연화는 마치 영상 화보집 같았는데, 영화에 담긴 감정을 미처 이해하지 못하였던 시절에도 <화양연화>는 부지불식간에 마음 한켠에 스며들고 말았다. 물론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시간을 들여 살펴볼 일이지만 말이다.
사실,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지극히 주관의 영역인지라, 누구에게는 아름다운 것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별로이기도 한 법인데, 그럼에도 나는 미를 추구하고 그 의미를 살피는 것은 소중한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형식 '그 이상'으로 승화 된 어떤 것이기 때문이며, 자신이 어떤 지점에서 마음이 움직이는 지를 아는 것은 삶에 있어 꽤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동물도 소중한 생명입니다.' 라는 말을 언어로 읽을 때와 도살장으로 들어가는 소의 눈을 마주쳤을 때, 우리의 마음은 다르게 반응한다. 메시지가 담긴 형식에 따라 우리가 느끼는 감각의 층위와 뉘앙스는 달라진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어떤 것'에 반응한다. 그리고 그것은 객관적인 미 라기 보다는 형식과, 태도와, 메시지의 총합이 마음 안으로 매스처럼 가르고 파고드는 순간에 가깝다. 우리는 자신의 취향을 발견 했을때 '마음에 든다'는 이야기를 한다. 마음에 든다는 것은 말 그대로 '그것이 내 안에 들어오게 되었음'을 말 한다.
빙 둘러이야기 했지만, 그렇게 다시 본 <화양연화>에서 나는 이전 편에서 고백한 나의 취향의 실타래를 다시금 발견할 수 있었다. 꽉 들어찬 화면, 어둡고 멜랑콜리하며 애틋한 긴장감, 카오스모스 같은 혼돈 속의 질서에서, 나는 언젠가 여행한 베트남이나 스페인 세비야의 골목, 시나몬 가루가 아무렇게나 뿌려진 진한 커피, 나그참파 인센스 스틱 향 같은 것들을 제멋대로 떠올리며 그러한 분위기를 관통하는 무드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들은 내가 나도 모르게 무장해제 되는 핀트들과도 맞닿아 있었다.
"많은 일들이 나도 모르게 시작되죠." 라는 화양연화의 대사는 비단 '사랑'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삶의 순간 순간에서 마음을 가르고 들어와 자리 잡는 것들은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게 있다가 사라지기도 하고, 어느 순간을 계기로 싹을 틔어올리며 마음의 방향키를 조종하기도 한다. 당신의 취향은 당신의 무드가 되기도 하며, 마음을 가르고 들어온 것을 더 깊이 들여다 보고 궁금해 하는 순간, 우리는 사랑에 빠져버리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