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가 강사가 된 이유 2
세 번의 수능 끝에 영화과에 입학했다. 영화과를 가기 위해서 수능을 세 번 본 것도 아니고, 영화감독이 너무 되고 싶어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첫 수능 때는 성적에 맞춰 철학과/호텔경영학과를 지원했고, 7차 추가 모집 끝에 합격했지만 추가 합격이라는 게 꼴에 자존심 상해서 안 갔다. 두 번째 수능 때는 성적은 그대로였는데 재수한 김에 더 좋은 학교를 가고 싶어 상향 지원했다가 모든 대학교에서 떨어졌다.
내가 살던 지역에서는 중학교 성적에 따라갈 수 있는 고등학교가 정해져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공부를 잘하는 고등학교를 갔었다. 그곳에서는 대학에 못 간다는 것은 인생에서의 패배자가 되는 것을 의미했다.
두 번의 대학 진학 실패로 문자 그대로 히키코모리가 되어버렸다. 친구들이 숙제를 과제라고 하는 것도, 선생님을 교수님이라고 하는 것도, 들어본 적도 없는 술 게임 얘기도 전부 자랑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듣기 싫었다. 네이트온인지, 드림위즈지니인지, 버디버디였는지(놀랍게도 스마트폰 보급화 전이라 카카오톡은 없었다) 친구 목록에 있는 모든 친구들을 차단하고 집에서 스타크래프트만 했다. 답답하면 자전거를 탔다. 자전거, 스타크래프트, 라면, 계란고추장밥. 그 시기에는 이 네 가지밖에 없었다. 책상과 이부자리 누일 공간만 간신히 있는 고시원 같이 작은 방에서 갇혀 살았다.
그 기간 동안 엄마는 잔소리 한 번 하지 않았다. 했을 수도 있는데 기억에는 남아 있지 않다. 샤라웃 투 마마. 내가 엄마였다면 방문을 없애버렸을 거다.
그렇게 히키코모리 생활을 하던 어느 날, 삼수 중이던 친구가 찾아왔다. 은인이다. 산속에 있는 고시원에 이번 달부터 들어갈 거라며 같이 들어가서 공부하자고 끈질기게 설득했다. 그때에도 여전히 대학을 못 가면 패배자라는 인식이 머릿속에 있었고, 슬슬 히키코모리 생활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다만 몇 달 놓아버린 공부를 다시 붙잡을 용기가 없어서 모른 체하고 있었다. 친구의 격려와 설득 덕분에 산속 고시원, 이름하여 ‘금동 고시원’으로 출가했다.
수능이 얼마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공부가 잘됐다. 정당한 식비를 지급했어도 식당엔 말라비틀어진 나물만 나왔지만, 쏟아지는 별들 아래의 밤들, 생전 처음 본 반딧불이 떼, 이불처럼 덮이는 천년수 은행나무 낙엽 등 비틀어진 나물 따위가 내 기분을 망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렇게 수험 생활이 끝났고, 받아 든 성적표는 ‘뭐, 이 정도면 선방했다’ 수준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웃기지만, 그때는 스스로 공부를 너무 많이 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공부를 가장 안 할 수 있는 학과가 무엇일까 고민했다. 그 고민 끝에 연극과와 영화과를 골랐다. 연극과는 최초 합격, 영화과는 추가 합격을 했다. 태어나서 연극은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영화는 주변 친구들보다 훨씬 많이 봤기에 영화과를 선택했다.
진학하고 보니 나보다 두 배, 세 배는 영화를 많이 본 사람들이 널려 있었다. 이때가 내 첫 잘못된 선택이 아니었을까 싶다. 경영학과의 입학 점수가 높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을 거다. 사람 구실 못 하고 까불다가 2011년에 입학한 학교를 2020년에 수료, 2021년에 최종 졸업했다. 석사가 아니라 학사다.
눈치를 보며 살았다. 집에서는 엄마에게 신경 쓰이지 않으려고 발 앞꿈치로 걷는 게 익숙했고, 학교에서는 밀린 급식비를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까 고민했고, 내가 좋아하는 친구가 나만큼 나를 좋아할까 고민했고, 소풍날 버스 옆자리에 아무도 앉지 않을까 걱정했고, 새로 생긴 음식점에 들어가는 것도 무서웠고, 무엇보다 남들 앞에서 이런 내면의 요동을 숨기는 게 어려웠다. 자유롭고 싶었다. 여기서의 자유란 남의 시선에 나를 제한시키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아주 옛날에 양동근 님이 토크쇼에서 이런 얘기를 하는 걸 봤다. “왜 그렇게 자유롭게 행동하냐”는 핀잔 섞인 진행자의 질문에, “나는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다. 자유롭지 않기 때문에 일부러 그런 행동을 더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 말을 나만의 아포리즘처럼 마음에 담았다. 지금의 내가 자유로워 보인다면 그 때문일 수도 있지만, 여전히 속박된 기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입학한 지 채 1년이 되지 않았을 때다. 글과 영상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글을 읽는 걸 더 좋아했고, 글을 쓰는 걸 더 좋아했다. 영화는 이야기의 한 갈래로 도달한 취향일 뿐, 영화과에 즐비한 씨네필들처럼 내 마음속에서 특별한 위치를 점유하진 않았다. 소노 시온 감독의 러브 익스포져를 보기 전까진 말이다.
모두에게 인생을 망친 영화가 하나쯤 있다면, 내 경우는 이 영화다. 추천하기에는 다소 문제적이지만.
네 시간의 러닝 타임 동안, 손바닥만 한 스마트폰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손이 저린 것도 모르고, 그저 이 시간이 제발 끝나지 않기를, 여기서 이야기가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세상의 룰—윤리라든가, 도덕적 기준이라든가, 종교적 교리라든가, 관습이라든가, 법률이라든가—을 아무렇지 않게 무시해 버리는 그 모든 장면에서 해방감을 느꼈다. 소노 시온이라는 사람이 최선을 다해 자유를 외치고 있음을 느껴버렸다. 이런 걸 하기 위해 영화를 만드는 거라고 생각하게 되어버렸다. 이 날 이후로 영화라는 매체가 “재밌다”고 여겨졌고, 영화감독이 되고 싶어졌다. 나도 소노 시온처럼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부모님의 지원 덕분에 보통의 학생들보다 더 많은 작품을 찍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망할 놈의 소노 시온 때문에 영화의 의미와 감독의 역할에 대해 오해해 버린 나는, 9년의 학교 생활 동안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아니, 실은 재능이 없었다. 아니, 실은 재능은 있었을 수도 있는데 나태했다. 스스로 노력했다고 할 만큼 만족스러운 순간이 없었다. 과정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결과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는 그 마음 상태를 얻지 못했다. 노력이라곤 히키코모리 시절 스타크래프트 할 때가 마지막인 기분이었다.
서른이란 나이에 학교에서 나오며, 내 손에 아무것도 쥐어 있지 않다는 사실에 낙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