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가 강사가 된 이유 3
장래 희망이 사무직 회사원인 사람이 있을까 싶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고, 과학자, 우주비행사, 대통령 같은 직업을 실제로 가능하다며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 초등학교 장래 희망란에 공무원이나 회사원을 적었다면 오히려 부모님이 실망했겠지. 하지만 친구들의 아들딸들이 직장에서 자리를 잡고, 결혼을 하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모양새를 갖추어 가는 동안, 내 자식은 꿈을 좇는다며 허송세월하는 모습을 보면서, 부모님도 내심 이제라도 공무원이나 회사원을 희망하기를 바라셨을지도 모른다. (라고 썼지만, 그럼에도 무한한 응원을 보내주셨다는 걸 알고 있다)
<라임크라임>이라는 독립 영화에서 조감독을 맡았다. 늘 보던 선후배들과 함께 작업하다 보니 그곳이 직장이었다는 걸 잊었지만, 어쨌든 나의 첫 직장이었다. 갑과 을로서 계약을 맺었고,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을 했다. 영화가 준비되고 촬영이 되고 마무리되는 동안 여러 사건이 있었고, 그 작품이 끝난 뒤 나는 영화에 대한 꿈을, 재능의 한계를 핑계 삼아 노력하지 않은 걸 인정하지 못하며 포기해 버렸다.
수업에 교과서를 가져오지 않으면 선생님이 항상 하는 말이 있었다. 전쟁에 총도 없이 왔냐고. 학생 때는 와닿지 않던 그 말을 구직 활동에서 뼈저리게 체감했다. 나는 무스펙 인간이었고, 솔직히 스펙이 당최 뭔지도 잘 몰랐다(지금도 모름). 전선에 뛰어든 다른 이들이 최소한 영어 점수라도 하나씩 들고 있을 때, 내가 들고 있는 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단편 영화 제작 경험과 일반인은 들어본 적도 없는 독립 영화의 조감독 경력, 그리고 경쟁자들보다 많은 나이밖에 없었다. 취업 준비라는 걸 해야 할까 고민도 해봤지만, 도대체 취업 “준비”라는 게 뭔지도 알 수 없었다. 취업 준비를 준비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자기 객관화(라고 쓰고 자기혐오였던)가 잘 되어 있었기에, 모두가 알 법한 대기업도, 은근 알짜인 중견 기업도 내 자리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처음에는 영화 업계에, 그다음에는 영화사에, 그다음에는 영상 프로덕션에, 그다음에는 광고 대행사에, 그리고 그다음에는 어디든 좋으니 어쨌든 영상을 만드는 곳에 지원했다. 영상을 만들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그나마 가진 재주가 그것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내 작품을 위해 필요한 만큼만 쌓은 영상 기술은, 전문적으로 그것만 연구한 기술자들에 비해 보잘것없었다. 사실 내 장기는 영상 편집 같은 게 아니었지만, 그때는 가진 것 없음에 매몰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를 살필 여유가 없었다.
자기소개서를 쓰는 게 고역이었다. 기본적으로 회사에 바라는 게 없었다. 근로 노동법에 저촉되지 않는 선에서 받는 돈만큼의 가치는 반드시 해낼 수 있다는 게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선언이었다. 최저 임금보다는 높은 임금, 야근과 특근이 없는 주 40시간의 근무 시간. 내가 바라는 건 이것뿐이었다. 이 시기의 나는 대단한 도전을 하지도 않았으면서 대단한 실패를 겪은 것 같아 자존감이 바닥을 모르고 떨어지고 있었고, 앞으로의 인생에 희망은 없을 것이며, 사회의 아주 작은 톱니바퀴라도 차지해서 최소한의 사람 구실은 하며 영혼 없이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위로나 응원은 고까웠고, 나만이 나를 위로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동시에 자신을 위로할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다.
충격 실화. 최저 임금보다 높은 임금, 워라밸이 보장되는 주 40시간 근무 환경은 누구에게나 허락되는 게 아니었다.
이때 내 마음은 어떤 빛도 거부하며 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다. “이거라도 해야지.” 하며 지원했던 회사들에게도 연락을 받지 못하는 일이 허다했고, 가까스로 면접이라도 보러 가면 연봉 2200과 함께 야근과 주말 출근을, 합격을 인질 삼아 은근히 강요하는 경우도 많았다. 남들은 아무렇지 않게 뛰어넘는 세상의 허들이 나에게만 높게 느껴졌고, 점점 허들을 오르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자기소개서에 이렇게 쓰고 싶은 마음이었다. “보잘것없는 주제에 지원해서 죄송합니다.”
어렵사리 처음 들어간 회사는 편집 및 색보정 솔루션을 하는 곳이었다. 희망 연봉을 묻는 대표님의 말에 노예처럼 “주시는 대로 받겠습니다.”라고 말해버렸다. 그러자 대표님은 호쾌하게 웃으며 우리는 그런 회사가 아니라고 했다. 대신, 처음 일하는 거라 배울 게 많으니 몇 달간은 정규 근무가 끝나고 한 시간 동안 나머지 공부를 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거둬주신 것에 감사해야 할 입장이니 당연히 하겠다고 했다. 일을 시작하면서 계약서는 보지 못했다.
구로디지털단지로 출근을 시작했고, 영문 매뉴얼을 하루 종일 보고 익히는 게 첫 업무였다. 평생 읽은 영어 지문보다 많은 지문을 읽었고, 대표님의 감시하에 색보정 실로 들어가 나머지 실습을 했다. 밤 8시가 다 되어서야 회사에서 빠져나왔는데, 보통의 퇴근 시간보다 늦은 시간임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퇴근을 위해 지하철로 향하고 있었다. 그렇게 일주일을 출근하고 퇴근하고, 앞으로의 삶에서 바랄 수 있는 건 없고, 그저 사회 구성원으로서 활동할 최소한의 역할만 주어진다면 더할 나위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또 결심했는데……
마지막이 될 퇴근길, 구로디지털단지역에 도착하기도 전에 길 한복판에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이렇게 수많은 건물 속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아무렇지 않게, 힘들지 않게 자신의 역할을 잘해 나가고 있는데, 어려움이 있더라도 각자의 방식대로 극복해 나갈 텐데, 현대 시민에게 지워진 의무를 큰 불만 없이 이행하고 있을 텐데, 왜 나만 이렇게 힘들까. 내게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어디서부터 잘못됐던 걸까. 어쩌면 나는 사회 부적응자로 태어난 게 아닐까.
생각이 꼬리를 물며 울음은 거세졌고, 눈물범벅이 된 모습이 초라하고 창피해서 걸음을 멈췄다. 당장 일을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들었고,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사회 부적응자의 증거 같아서 또다시 눈물이 났다.
마음에 남아 있던 욕망이 나를 쿡쿡 찔렀다. 너 톱니바퀴 되고 싶지 않잖아. 포기한 척하는 거잖아. 아직 바라는 거 많잖아. 희망이 무서운 거잖아. 그렇게 말하는 욕망을 쓰레기통에 토해버렸다. 혓바닥 끝에 끈질기게 늘어진 욕망에서 더러운 냄새가 났다.
완전히 어두워지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튿날 무단결근을 했다. 사회부적응 1등급 낙인을 몸에 찍으며, 나는 비로소 완전한 사회 부적응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