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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쭝 브런치 Oct 25. 2020

최고의 후추






    어느덧 마지막 여행지인 캄폿에 도착했다. 나는 우선 투어부터 알아봤다. 캄폿 강변에는 여행사들이 많았는데, 그중 제일 가까운 곳으로 들어갔다. 여행사 직원은 염전과 후추 농장을 방문한 후 근교에 있는 켑에 가서 게 요리를 먹고 래빗 아일랜드(Rabbit Island)까지 갔다 오는 일정을 추천했다. 이 정도면 캄폿과 켑은 충분하다고 했다. 아침부터 시작되는 빡빡한 일정이 부담되기는 했지만 이번 여행의 마지막 투어라고 생각하니 의욕이 생겼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여행사로 갔다. 전날 예약을 받은 남자가 나를 반갑게 맞아줬다.

   「갑자기 일행이 한 명 생겼는데 괜찮죠?」

   「네. 상관없어요.」

    잠시 후 하얀색 벤이 사무실 앞에 서더니 챙이 넓은 밀짚모자에 붉은색 원피스를 입은 백인 아주머니가 내렸다. 

   「안녕하세요.」 아주머니가 내 옆자리에 앉으며 인사했다. 

    금발에 인상이 좋은 아주머니였다. 나도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그 뒤로는 영어 회화 책 1장에 나올 법한 말들로 대화를 이어갔다. 아주머니는 핀란드의 어느 대학교의 교수인데 프놈펜에 출장을 왔고, 하루 정도 일정이 비어 캄폿을 방문했다고 했다.

    그녀에게 캄폿에 온 이유를 묻자 가장 신뢰하는 현지인 동료가 캄보디아에서 한 곳만 가야 한다면 캄폿과 켑을 가라고 추천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물론 그녀는 이미 앙코르 왓을 방문한 후라 앙코르 왓은 후보에서 제외했다고 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이번 투어가 기대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먼저 염전을 방문했다. 보통 캄폿 하면 가장 유명한 것이 후추다. 하지만 타이만에 인접한 이곳은 후추에 가려져서 그렇지 소금 또한 품질이 좋기로 유명하다. 염전은 바다가 바로 보이는 곳에 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이곳의 염전은 도로변에 논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툭툭 기사는 소금은 건기에 바닷물을 가져와서 만들기 때문에 우기에는 딱히 염전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휑한 이곳을 보며 활기찬 염전의 모습을 상상해봤다. 한없이 많은 바닷물이 이곳에 와서 소금이 됐기 때문일까, 텅 빈 염전에서 바다 내음이 났다. 



    아주머니는 출발할 때부터 작은 풍경 하나라도 놓칠세라 스마트폰을 들고 쉼 없이 사진을 찍었다. 벤에서 내렸을 때도 우리가 탈 툭툭을 먼저 사진으로 찍은 후 툭툭에 올랐고 자신의 자리에서 잘 보이지 않는 건 내게 부탁을 해 사진으로 담았다. 공터, 염전, 물소 등을 비롯해 길에 있는 정치인의 얼굴이 들어간 정당 광고판까지 ‘어메이징, 어메이징(Amazing, Amazing)’을 연발하며 스마트폰 액정을 눌러댔다. 

    염전 다음으로 우리는 후추 농장에 갔다. 내가 가장 기대하던 순서였다. 바탐방에 있을 때부터 캄보디아 사람들의 후추 사랑이 얼마나 큰지 자주 봐왔다. 어떤 음식이든 후추가 안 들어가는 것이 없고, 쪽접시에 소스랍시고 후추와 라임 한 조각만 담아 나오는 경우도 많았다. 캄보디아에서 이토록 후추를 많이 먹는 건 이곳이 후추 원산지이기 때문인데, 그중에서도 캄폿의 후추를 최고로 친다.

    우리는 소티의 후추 농장(Sothy’s Pepper Farm)에 도착했다. 입구에서 짧은 머리에 키가 큰 남자가 우릴 맞아줬다. 그는 자신을 킴이라고 소개했다. 

    킴은 먼저 후추나무를 보여줬다. 후추나무는 마른 야자수 잎으로 둘러친 하우스 안에 있었다. 야자수 잎이 차광막이 되어 반그늘 상태를 만들었다. 후추나무는 덩굴식물로 일정한 간격으로 박힌 장대를 휘감으며 자라고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긴 잎들 사이에 작은 녹색 열매가 포도처럼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나는 생전 처음 보는 후추 열매가 신기했다. 늘 바싹 마른 검은 알갱이만 봤는데 파릇한 녹색 열매를 보니 새삼 후추도 원래 생명을 가진 식물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하우스 밖에는 커다란 평상이 있었는데 그 위에 놓인 세 개의 대나무 채반에 각각 검은색, 검붉은색, 상아색 후추들이 담겨 있었다. 킴은 이것들을 모두 햇볕에 말리는 중이라고 했다. 

    킴은 우리를 카페테리아로 안내했다. 그곳엔 긴 식탁이 하나 있었고, 한쪽 면에는 가공한 후추를 진열해 팔았다. 식탁에는 여행객으로 보이는 중년 여성이 앉아 있었다. 우리는 그녀 옆에 나란히 앉았다. 킴은 카운터에 있는 직원에게 차를 주문했다. 잠시 후 직원은 우리 앞에 연노란 차가 담긴 잔을 하나씩 내려놓고 갔다. 

   「후추와 레몬그라스로 우려낸 차예요. 한번 맛보세요.」 킴이 말했다. 

    나는 천천히 차를 음미했다. 후추와 레몬향이 은은했다. 모든 훌륭한 것들이 그러하듯 차는 단숨에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후추가 들어갔다고 해서 매울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차를 다 마신 후에도 입 안에 여운이 오래 남았다. 킴의 자신감 있는 표정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맛이 참 좋죠?」 킴이 물었다.

    우리는 모두 차의 매력에 빠져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킴은 이런 반응이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이어서 그는 자신의 농장에서 키운 후추의 장점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는 어떤 화학약품도 사용하지 않고 후추를 재배한다고 했다. 모두 유기농이라는 것이다. 에코서트(EcoCert, 세계적인 유기농 인증 기관)에서 검증도 받은 것이라며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후추는 녹색 열매로 열리지만 향신료로 가공된 후에는 흑색, 백색, 적색으로 분류된다. 흑후추는 덜 익은 열매를 따 끓는 물에 데쳐 햇볕에 말리고, 백후추는 완전히 익은 열매를 물에 불린 후 겉껍질을 벗겨 말린다. 마지막으로 적후추는 완전히 익은 열매를 따서 말린다. 셋 다 맛과 향이 다른데, 나는 개인적으로 부드러운 백후추가 가장 좋았다. 

    킴의 후추 자랑은 계속됐다. 그는 최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후추 블라인드 테스트에서 가장 좋은 평을 얻은 것이라며 통후추 몇 알을 건넸다. 그리고는 그것을 씹어 보라고 했다. 내가 너무 맵지 않을까 망설이는 동안 아주머니들은 단숨에 후추를 입에 넣고 씹었다. 나도 후추를 조심스럽게 입에 넣었다. 후추는 그리 맵지 않았다. 오히려 알갱이를 씹을 때마다 퍼지는 향이 어찌나 풍성하던지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입체적인 맛이 났다. 향을 맡으면 매워서 바로 재채기가 나오는 게 후추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농장을 떠날 때 아주머니들은 후추를 종류별로 잔뜩 구입했다. 나 또한 지갑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1,2달러를 깎으려고 그렇게 애를 썼는데 후추를 살 때는 흥정조차 하지 않았다.  

    툭툭 기사는 원래 투어에 포함돼 있던 동굴은 갈 수 없다고 했다. 전날 비가 많이 와 동굴로 가는 길이 침수됐다는 것이다. 우기 때는 이런 일이 자주 있으니 양해를 구한다고 했다. 핀란드 아주머니는 우기에 여행을 해보니 방문할 수 있는 곳은 제한적이지만 오히려 좋은 점도 많다고 했다. 해가 강하지 않아서 덜 힘들고, 무엇보다도 우르르 몰려다니며 시끄럽게 떠드는 단체 여행객들이 없어서 좋다고 했다. 나도 비수기엔 사람이 많지 않아서 좋았다. 

    우린 정오가 다 되어 켑에 도착했다. 게로 유명한 곳이라 그런지 캄폿과 켑 경계에 ‘켑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이란 문구와 함께 커다란 게 모양의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덕분에 툭툭 기사의 설명 없이도 우리가 켑에 도착했다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툭툭 기사는 게 시장에 우리를 내려주더니 한 시간 정도 점심시간을 가지라고 했다. 

   「점심 같이 먹을까요?」 내가 물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툭툭 기사가 웃으며 사양했다. 

   「저는 비건(Vegan, 엄격한 채식주의자)이라 음식을 따로 가져왔어요.」 핀란드 아주머니가 말했다.

    결국 우리 셋은 각자 알아서 점심을 먹었다. 

    나는 게 시장 옆에 늘어선 식당들 중에서 킴리(Kimly)라는 곳에 들어갔다. 식당 안은 점심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안쪽에는 가로로 긴 창이 있었는데 그 너머로 바다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종업원은 나를 창가 쪽 자리로 안내했다. 나는 생후추로 만든 소스를 곁들인 게 튀김을 주문했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잠시 턱을 괴고 창밖의 풍경을 감상했다. 굽이치는 파도는 같은 듯 다른 듯 질리지 않았다. 

    잠시 후 음식이 나왔다. 녹색 후추 열매가 게 튀김 위에 잔뜩 얹어져 있었다. 방금 전 농장에서 본 것과 같은 것이었다. 생후추는 수확을 하면 상태가 금방 변하기 때문에 산지가 아니면 맛보기 힘든 식재료다. 열매 그대로의 후추는 처음에는 씹기 두려웠지만 후추 농장에서의 경험 덕분에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신선한 후추 향이 입안에 퍼졌다. 별미가 따로 없었다. 나는 생후추만 따로 더 주문할 수 없냐고 물었지만 그렇게는 안 된다고 했다. 아마 캄보디아를 떠나면 가장 그리운 음식이 되지 않을까.

    점심식사 후 우리는 래빗 아일랜드로 향했다. 이곳은 핀란드 아주머니가 줄곧 기대가 된다고 말한 곳이었다. 

   「래빗 아일랜드를 왜 그렇게 기대하세요?」 내가 물었다.

   「이름이 너무 예쁘거든요.」  

    래빗 아일랜드. 그렇다. 토끼 섬이다. 섬의 모양이 토끼 형상을 닮아서? 아니면 섬 전체가 토끼 서식지인 것일까? 나도 호기심이 생겼다. 

    툭툭 기사는 우리를 선착장에 내려 줬다. 섬까지는 작은 보트를 타고 가야했다. 보트엔 다른 여행객들도 많았는데 마땅한 좌석도 없어 나무판자 위에 아무렇게나 앉았다. 섬까지는 약 15분 정도가 걸렸다. 중간쯤 지날 때는 파도 때문에 배가 심하게 흔들렸다. 우리는 잠깐이었지만 모두 녹초가 됐다. 배가 섬에 가까워지자 운전기사는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묘하게 기분이 좋아지는 노래였다. 다른 사람들의 표정을 보니 나와 같은 생각인 것 같았다. 



    섬에는 선착장이 따로 없었다. 먼저 온 보트들은 해변 근처에 둥둥 떠 있었고 우리가 탄 보트도 해변에 도달하기 전에 멈췄다. 운전기사는 노래를 멈추더니 먼저 배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보트에 연결된 밧줄을 들고 육지까지 성큼성큼 걸어갔다. 나는 당연히 발을 디딜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 무릎까지 오는 물 위로 뛰어내려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어떤 안내도 없이 홀로 육지로 걸어가는 운전기사를 보며 우린 모두 어리둥절해했다. 기다리다 못한 사람들이 하나둘 물로 뛰어내렸다. 핀란드 아주머니도 따라 내렸다. 그녀는 원피스가 물에 젖지 않게 원피스 끝을 모아 잡았다. 나는 긴 바지에 운동화 차림이었다. 신발을 벗고 바지를 걷어 올렸지만 바지가 물에 젖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서둘러 앞선 일행을 따라갔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방갈로가 가득한 리조트였다. 방갈로 앞으로는 햇빛이 부서지는 눈부신 백사장이 펼쳐졌다. 리조트에는 다들 어디에서 왔는지 사람들이 많았다. 화상을 입을 정도로 해가 강했지만 그들은 덱 체어(Deck chair)에 누워 일광욕을 하고 있었다. 일부는 무리를 지어 비치발리볼을 하고 리조트에서 제공하는 마사지를 받거나 칵테일을 마시는 사람들도 있었다. 핀란드 아주머니는 어느새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바다에 들어가 물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나는 젖은 신발을 볕에 말려 두고 야자수 그늘 아래를 걸었다. 모래가 굉장히 고왔다. 발가락 사이사이를 채우는 모래의 감촉이 좋았다. 나는 칵테일을 한 잔 마신 후 해먹에 누워 낮잠을 잤다. 가끔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편안했다. 정신없이 돌아다닌 여행의 끝에 이런 달콤한 휴식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흠뻑 젖었던 바지가 다 마를 즈음 나는 잠에서 깼다. 몸을 일으켜 앉으려는데 수풀 사이로 뭔가가 움직였다. 토끼였다. 토끼는 내 쪽을 보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평화로운 섬의 풍경은 그대로였고 토끼를 본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   

    우리는 다시 보트를 타고 섬을 나왔다. 보트 운전기사는 선착장이 가까워 오자 또다시 노래를 불렀다. 역시 기분이 좋아지는 노래였다. 

   「혹시 리조트에서 토끼를 봤나요?」 내가 핀란드 아주머니께 물었다. 

   「아뇨. 못 봤어요. 섬에 토끼는 살지 않는다고 하던데요? 아까 리조트 직원에게 물어보니 섬이 토끼 모양이라 그렇게 부른다고 하더군요.」

    내가 본 건 뭐였을까. 잠이 덜 깼던 걸까. 토끼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사라진 걸까. 나는 아주머니께 토끼를 봤다고 말하지 않았다. 


    투어를 마치고 게스트 하우스로 돌아와 짐을 꾸렸다. 몬둘끼리 이후로 필요 없는 것들을 조금씩 버려서 그런지 배낭이 가벼웠다. 몬둘끼리 트레킹이 궁금해 시작한 이 여정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추억을 남기며 끝이 났다. 

    이제 다시 바탐방으로 돌아간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새 알고 지낸 얼굴들이 떠올랐다. 닥터 후, 멜빈, 폴과 유미코, 김쌤, 차야 아저씨와 썸낭 아저씨, 프사 봉축의 단골집 사장님들 그리고 제이까지. 그들을 다시 볼 생각을 하니 미소가 지어졌다. 여행을 떠나왔는데 돌아가서 쉬고 싶은 곳이 바탐방이라니. 제일 먼저 한국이 떠오르지 않은 게 신기했다. 





스물아홉 나의 캄보디아 STAY, NOT ST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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