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것들
무엇에 대해 안다, 이해한다고 말하려면 어느 정도의 성의가 필요할까
의심이 가더라도 일단 '이해한다'고 말해주는 것 정도만으로도 '성의'라고 할 수 있을까.
하미나 작가의 '미쳐있고 괴장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이하 '미괴오똑')을 읽었다. 이삼십 대 젊은 여성의 우울증의 원인과 젊은 여성들이 처한 현실을 뛰어난 공감능력으로 들여다보는 책이다. 아마, 작가 스스로도 우울증을 오랫동안 겪고 있기 때문일 테다.
'왜 그렇게 의학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질환을 가진 사람은 유독, 여성, 노인, 빈곤층 등에 더 많은 것인지 질문할 필요는 있다' ('미괴오똑')
작가는 이 문장을 통해 책 전체를 아우르는 대 질문을 던진다. 왜 유독 사회적 약자로 구분되는 사람들에게서 우울증과 같은 정신건강 문제의 발병률이 높은지에 대해서 말이다. 많은 세월, 여성 우울증을 '호르몬' 문제로 설명하는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리의 이해력에 작가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아니, 마땅히 그래야하는 관점을 제시한다. 생리기간의 예민함, 산후우울증 등 모든 여성이 겪는 우울증의 원인을 우리는 오랫동안 '호르몬의 변화' 정도로만 이해해왔다. 특정 시기에 활성화되는 생물학적 호르몬의 탓으로 돌림으로써 여성 우울증을 촉발시키는 사회에 일조한 나 자신을 책임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였다. 하미나 작가는 이삼십대 우울증 당사자들을 다수 인터뷰하면서 그들이 왜 우울증을 앓았는지, 우울증을 앓았을 당시 그들이 처해있던 환경, 상황에 집중한다. 젊은 여성들이 겪는 우울증은 한 명의 피해자와 가해자가 있는 1:1 구도가 아니라, 피해자와 우리 사는 사회, 내가 속한 국가의 관계에서 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세상은 존재하는 수많은 고통 중 어떤 것만을 선별적으로 인식하고 아파해 왔다' ('미괴오똑')
여성들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치만큼이나 여성들이 겪는 고통은 부수적 고통, 하찮은 고통, 의지가 약해 생기는 고통, 생물학적으로 열악해 생기는 고통으로 평가절하되어 왔다. 사회가 자원을 투입해 돌봐야하는 고통에서 늘 후순위였다. 대부분은 가정에서 엄마, 딸이 돌봄을 제공해왔다. 그리고 돌봄을 강요받아왔다. 작가는 여성이 겪는 정신질환의 원인을 사회에서 찾으려하지 않고 개인에게서 찾으려하는 움직임을 지적한다. 특히 우리 사회의 과도기를 살아가는 이삼십 대 여성은 일상 속에서 수많은 젠더폭력에 노출돼 있고, 취업과 취업 이후의 삶에서 차별이 자연스럽고 당연시되는 사회를 직면한다. 졸업 전까지는 의무 고등교육을 받고 좋은 성적을 기반으로 미래를 꿈꾸면서 사회에 나왔지만 세상은 여성을 반기지 않고 더 나아가 여성들은 안전을 위협받는다. 건강하고 정상적인 사회라면 마땅히 실현되어야 할 이상이 무시되는 현실 속에서(2019년 여성 고용률은 51.6%로 남성 고용률 70.7%에서 현저히 낮음. 2019년 남성임금 대비 여성임금 수준은 69.6%로 불평등 심각) 이삼십 대 여성이 건강한 정신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작가는 젊은 여성들의 우울증을 이러한 사회적 맥락에서 살피지 않고서는 20대 여성 자살율 1위, OECD 국가 중 자살율 1위의 불명예를 벗어날 수 없다고 강조한다.
나 또한 첫 우울증은 청소년기 폭력적인 가정환경으로부터 비롯되었고, 성인이 된 후에는 직장생활을 바탕으로 한 사회생활을 통해 재발되었다. 우울증은 삶에 대한 희망과 기대, 삶을 앞으로 진전시켜 나가려는 의지를 상실케 한다는 점에서 불행이다. 우리의 삶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은 일상 속 작고 소중한 성취와 가까운 미래에 대한 작은 희망들이다. 우리 사회에는 차별과 혐오, 불평등과 편견을 유독 많이 겪어온 집단이 있고, 여성 뿐만 아니라 그 집단들에게서 우울증과 같은 정신질환의 발병율과 자살율이 높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요즘 우울증을 비롯한 정신질환을 다룬 책을 다양하게 보고 있다. 내 병을 좀 더 알고 싶고 나를 이해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디서도 내 질병의 가해자가 사회의 건강하지 못한 구조와 관행, 행동양식에 있다는 걸 이야기해 준 책은 없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나 또한 줄곧 모든 것은 뇌기능과 뇌 호르몬의 불균형으로 생각해왔다. 우울의 원인을 신경생물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치료가 심플해서였다. 약물치료를 통해 호르몬을 조절하면 일상을 힘들게 하는 기분장애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약을 복용해왔지만 한편으로는 단약을 하고 또 비슷한 상황을 직면하게 될 경우 내 정신이 제대로 기능을 할 거라고 믿을 수는 없다. 그 불안함이 약을 붙잡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울증을 해결하려하기보다는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택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또 다른 관점에서 우울증을 탐구해준 하미나 작가에게 그를 잘 모르지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