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보단 단체
동네를 빠져나가 대로를 접하고 있는 코너는
버스 정류장까지 있는 명당이다.
오래 동안 공사를 하길래 뭐가 들어서나 늘 궁금해
하다가 카페라는 걸 알게 되었다. 실망이었다.
아파트 한 동 거리에 이미 빵을 잘 굽는 다른
카페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곳도 잘 가지
않았기 때문에 또 다른 카페가 하나 더
생긴다는 건 그다지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새로 오픈한 날 그 카페 옆을 지나게 되었는데
잘 모르긴 했지만 브랜드가 있는 카페였다.
사람들이 꽉 찼길래 개업 발이려니 했다.
하지만 3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손님들이 꽤 있다.
호기심이 생겼다. 지나다닐 때마다 안을 들여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매장의 구조가 특이했다.
테이블과 좌석이 미국의 데니스나 빕스같은 곳에서
볼 수 있는 것이었다. 테이블은 4인 이상이 앉을 수 있도록
한쪽이 둥글고 소파가 그 안쪽의 둥근 면을 따라
돌아나가는 형태였다.
그런 좌석이 5개 정도로 창 측이 아닌 벽 쪽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창 측에는 주방이 설치되었다.
거리의 행인들은 행인들은 카페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만 보였다. 이건 내가 모르는 새로운 트렌드인가?
유난히 더운 곳이라 햇볕으로부터 고객들을 보호하려고
하는 건가? 커튼이나 쉐이드를 설치하지 않도록 의도된
것인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혼자 오는
손님은 받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으로 보였다.
단체 위주의 모임을 위한 곳이니 혼자 들어올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거부감이 일었다.
세상은 혼자 여행해 본 사람들과 그러지 못한 사람들로
나눌 수도 있다. 혼자 여행해 본 사람들은 안다.
특히 한국이라는 나라는 혼자 들어온 손님을 바퀴벌레
보듯 한다. 아예 노골적으로 입장을 불허하기도 한다.
아주 한가한 시간에 간다고 해도 메인 메뉴의 주문은
2인분 이상이라고 벽마다 볼 수 있도록 붙여 놓는다.
소식하는 개인의 먹을 권리 따위는 없다.
나라에서 운영한다는 관광명소는 더 노골적이다.
단체할인이라는 단어가 대문짝만 하게 붙어있다.
단체가 벼슬이다.
안세영 선수가 고달픈 국가대표 생활을 했나 보다.
훈련과 쉼이 생명인 선수가 단체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막내가 해야 할 일들을 하느라 본인에게 집중할 수 없었다
고 한다. 이런 것이 대표적인 한국사회의 단체가 만드는
개인에 대한 폭력이다. 그리고 그것을 상식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제된다.
단체는 개인이 모여서 만든 것이고 개인들의 권리와
이익을 위해서 탄생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이곳에서는
단체가 개인을 압도하고 개인을 억압한다. 단체의 이익을
위해서 개인의 이익을 희생시키는 것을 미덕으로 칭송한다.
이런 일은 가족, 친척, 지역사회, 종교단체 등 등 모든 단위
집단에서 자행된다.
이런 사회 속에서 자라 성인이 된 사람들은 홀로 서기 어
렵다. 집단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개인의
철학과 소신은 불편한 것이 된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선택
에 대한 확신도 없으며 그것에 대해 당당하게 책임을 지려
하지도 않는다. 그놈이 그놈인 사회가 되고 천편일률적이다.
공은 단체에 돌리고 개인은 겸손해야 하기 때문에
뛰어난 사람이 나올 수 없는 구조다. 그런 사람은 경계의
대상이 되고 이인자는 제거된다.
3개월 만에 드디어 새로 생긴 카페에 앉아 본다.
아포가토 하나를 시켜 창 측에 배치된 뻔뻔하게도
4인 좌석에 앉았다.
와이파이 번호를 물었다.
브랜드 카페 본점의 운영방침상 매장에 와이파이를
제공하지 않는다고 한다. 눌러앉아 오래 버티지 말고
얼른 잔을 비우고 나가라는 협박으로 들린다. 하지만
꿋꿋하게 이 글을 다 쓰고 떠난다.
얼마 걸리지 않겠지만 언제 폐업하는지 꼭 지켜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