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이라는 과제
오늘의 영화는 2004년 개봉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터미널(The Terminal)]입니다.
상당히 명작임에도 불구하고 개봉 당시 엄청난 주목을 받지는 못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를 크게 두 부류로 구분하자면 [쥬라기공원]처럼 스케일이 압도적인 작품들이 있고 [캐치 미 이프 유 캔]과 같은 영화처럼 잔잔하지만 위트 있고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가 뚜렷한 작품들이 있죠.
[터미널]은 후자에 속하고 그 중에서도 더더욱 잔잔한 편에 속했던 터라 주목을 덜 받았던 듯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작인 것은 분명하죠. 고등학생 때 이 영화를 접했을 당시에도 상당히 감명 깊게 봤던 기억이 납니다.
영화의 설정은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실화를 기반으로 한 스토리이기도 하고요.
'크라코지아'라는 가상의 국가 출신인 빅터 나보르스키(톰 행크스)는 미국 뉴욕으로 여행을 하던 중 하필 본인이 비행기에 타 있는 동안에 고국에서 내전이 일어나고 정권이 바뀌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러는 바람에 미국 정부에서는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정부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게 되고, 그에 따라 엄밀히 따지면 미국과 수교 관계에 있지 않은 나라의 여권을 지닌 빅터는 미국 입국관리사무소로부터 입국 금지 처분을 받습니다.
여기서 애매한게 그렇다고 해서 다시 고국으로 추방을 당하는 것도 아니고, 난민으로 분류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죠.
내전과 그로 인한 정권 교체 및 미국과의 외교 단절 상황이 일시적인 현상일 가능성이 높으니 일단은 공항에서 "대기"하라는 지침을 받습니다.
그래서 빅터는 뉴욕 JFK 공항에 무한 "대기"를 하게 되고 그 과정 속에서도 만나는 인물들과 맞닥뜨리는 사건을 다룬 것이 [터미널]의 줄거리라 볼 수 있겠습니다.
부득이 한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졸지에 국제 미아 신분이 되어 버린 주인공과 "대기"라는 행위가 핵심 기능인 공항 터미널이 만나 훌륭한 영화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장기간 투숙을 하기 위해 방문하는 사람은 없죠.
터미널이라는 공간에 있는 사람들은 각기 다른 감정과 다른 사연을 안고 기다리죠. 설레임, 초조함, 슬픔, 기쁨, 또는 그저 단순한 무료함이나 지루함 등등.
그리고 영화는 이 터미널이라는 공간과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 인생 또한 기다림의 연속이며, 그 기다림이라는 행위 안에서 찾을 수 있는 행복과 삶의 의미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삶 자체가 기다림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인생의 특정 시점에서 누구나 정말 기다림 외에는 할 수 있는게 없는 시간들이 있습니다.
그 상황을 반전 시키기 위해 딱히 할 수 있는 것은 없고 그저 기다려야만 할 때... 그저 시간이 해결해 주기만을 간절히 바라야 할 때...
많은 남성들은 군 복무 시절이 그러한 시간으로 흔히들 다가오겠죠. 저 또한 그랬습니다.
그리고 현 시점에도 제 개인적으로 그러한 인생의 변곡점을 다시금 맞이한 듯 하여 오랜만에 이 영화를 꺼내보게 되었죠.
주인공 빅터 나보르스키는 기다림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상황 속에서 어떻게 지혜롭게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배우고, 적응하고, 친구를 사귀고, 남을 돕고 사랑에 빠지는 등 빅터는 답답할 수 있는 시공간 속에서 수많은 일들을 해내며 본인의 삶 뿐만 아니라 타인의 삶에도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인물이죠.
이러한 모습들을 보면서 삶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고 기다림이라는 과정 자체를 어찌 보면 훗날에는 감사히 여길 수 있는 인생의 한 구간이 될 수도 있겠다라는 희망을 가져보게 됩니다.
여러 재미난 상황들이 지나가는 와중에도 관객들은 본질적인 궁금함을 계속 유지하게 되죠.
'빅터는 뉴욕에 왜 온걸까? 뭘 위해 기다리는 걸까? 계속 들고 다니는 저 통조림 캔은 도대체 뭐지?'
영화 후반부, 빅터는 연인(이라고 할 수 있...나? 여튼...)인 아멜리아 (케서린 제타 존스)에게 사연을 털어 놓음으로서 관객들의 궁금증도 해소가 되죠.
빅터가 뉴욕에 온 이유와 기다리는 이유의 전말을 알게 되면 언뜻 보면 다소 허무하게 느껴질 수도 있으나 곱씹어 보면 눈물을 자아내게 만드는 그런 묘한 사연으로 저에게는 다가왔던 듯 합니다.
빼곡하게 쌓인 연주자들의 사인 카드/스티커를 하나 하나 내려 놓는 장면에서는 눈물을 참기가 힘들었었죠.
그러고는 빅터는 희대의 작업 멘트를 던집니다... 아멜리아가 '그럼 당신은 또 무엇을 기다리는거죠?'라는 질문에....
"I wait for you... Amelia...."
찢었다... 효와 애를 동시에 섭렵한 빅터 너란 남자....
빅터가 겪어 온 역경과 즐거움을 한시간 넘게 봐 왔기에 빅터의 미션과 그가 그를 이루었을 때의 감동은 배가 되어 관객들에게 다가옵니다.
희망일 잃지 않고, 그저 기다리고, 그 기다림 속에서 풍성한 삶을 산 인물이 기다림에 대한 보상을 받는 전개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기에 충분하죠.
영화 막바지에 드디어 빅터가 뉴욕에 입성하는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오히려 빅터에게 이러한 역경이 없었더라면, 그의 뉴욕 입성은 별다른 의미 없이 지나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빅터가 공항문을 나설 때 그의 몸에는 친구인 경찰관이 추우니 따뜻하게 가라고 입혀 준 외투가, 그의 손에는 그 동안 친분을 쌓은 이들이 준 선물이 한 보따리 들려 있죠.
기다림이 있었기에 이러한 아이템을 장착하고 빅터는 문을 나설 수 있었고, 그랬기에 밖에서 길게 숨을 들이 마실 때 감동이 더 크게 다가왔겠지요.
볼 때마다 느끼지만 [터미널]은 영화가 전반적으로 참 따뜻하고 희망찹니다.
기다림에 지쳐갈 때, 희망이 희미해져 갈 때, 삶의 의미가 퇴색되어 갈 때 한 번씩 다시 찾게 되는 그런 영화인 듯 합니다.
기다림이라는 과제를 수행 중인 저도, 저와 같이 무언가를 기다리고 계신 모든 분들도 빅터처럼 언젠가는 그 기다림에 대한 보상을 부족함 없이 조만간 꼭 받으시기를 기원하며 글을 마칩니다.
Till next ti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