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인 줄 알았는데 늘 곁에 있었다
나는 이탈리아에 산다. 그것도 아주 한적한 시골, 아니 산골에 살고 있다. 얼마 전, 집 앞 도로에 아스팔트가 깔렸지만 원래는 비포장도로였고 주변엔 다른 집이 없다. 위아래로 몇 백 미터를 가면 집이 있다. 하지만 모두 오래 방치된 빈집이다. 이런 한적하고도 고요한 곳에서 이탈리아인 남편과 대형견 한 마리, 그리고 고양이 두 마리와 살아가고 있다. 현지어가 유창하지 못한 나는 이곳 생활에 대한 적응이 매우 더디다. 벌써 7년이란 시간을 보냈지만 어느 것 하나 자신 있게 잘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노력하지만 애쓴 만큼 같은 크기의 외로움이 가슴 한 구석에 쌓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누구 탓을 하겠는가. 선택한 것은 나고 좀처럼 적응하지 못하는 것도 나인걸. 자신을 다독이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아주 우연히 선택의 여지없이 외로움을 친구 삼아 살아가던 내 마음이 따뜻함으로 가득 차는 일이 일어났다. 예고도 없이 설거지를 하는 도중에 훅하고 말이다.
나는 설거지를 할 때 두세 번 나누어서 한다. 그 이유는 좁디좁은 우리 집 싱크대 탓이다. 가로 47cm, 세로 41cm 밖에 안 되는 작은 공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그릇을 나누어 씻는 것이다. 이날도 어김없이 냄비와 프라이팬과 같은 덩치가 큰 녀석들을 옆으로 빼두고 제일 많은 컵과 유리잔을 먼저 씻었다. 거품을 칠하고 뽀득뽀득 헹궈내어 나란히 세운 뒤 다음 순서를 기다리는 식기들을 씻기 전, 전기포트에 물을 데운다. 아주 오래된 산골집이라 찬물밖에 나오지 않기 때문. 뜨거운 물을 틀려면 보일러를 틀어야 하는데 데우는 시간만 2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따뜻한 물은 욕실 수도로만 제공될 뿐 부엌 수도로는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번거롭지만 매번 포트에 물을 데워 사용한다. 물이 끓기를 기다리는 동안 마른행주로 1차로 씻은 컵들을 닦아 찬장에 넣었다. 먼저 이케아에서 산 큰 유리잔들을 값비싼 와인 잔을 닦아내듯 정성스레 닦았다. 창가로 들어오는 햇살에 비춰가며 작은 얼룩하나 없이 닦아낸 잔들을 찬장에 나란히 줄을 세웠다. 그다음 순서는 머그잔들이었다. 정성스레 닦아 손잡이가 오른쪽으로 가도록 하여 가지런히 놓았다. 이 과정에서 훅하고 감동이 밀려왔다.
흰색에 손잡이가 특이한 첫 번째 컵엔 ‘당신이 좋아진 이유’라는 한글이 은은한 잿빛으로 찍혀있다. 나의 20년 단짝친구가 이탈리아로 시집가는 내게 준 선물이었다.컵을 보니 언제나 밝고 씩씩한 친구가 떠올라 기분이 좋아졌다. 내가 이탈리아에 지내는 사이 그녀는 결혼을 했고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그 반짝이던 순간을 함께하지 못해 항상 미안하고 아쉬운 마음이 든다. 다음 컵은 일터에서 만나 마음을 나눈 친구에게서 받은 컵이었다. 작년에 한국에 잠시 들어갔을 때 우린 정말 오랜만에 만났다. 거의 5년 이상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제 본 사이처럼 익숙한 느낌이 들어 좋았다. 나를 만나기 위해 일본에서 한국으로 날아와 준 것만으로도 너무 고마운데 친구는 양손 가득 선물을 들고 와 나에게 쥐어주었다. 그때 받은 컵이 바로 연분홍의 벚꽃으로 장식된 스타벅스 컵이었다. 그런데 이 컵이 애틋한 이유는 따로 있다. 몇 해 전 친구는 지인의 선물을 추천해 달라며 연락이 왔었다. 카카오 톡으로 사진을 주고받으며 내가 예쁘다고 골라준 컵을 선물하며 내 몫까지 사두었던 것이다. 우리가 언제 만나게 될지도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나를 위해 산 컵을 고이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다 드디어 작년에 한국에 들어간 내게 건넨 것이었다. 실제로 이렇게 행동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란 것을 알기에, 친구의 마음이 너무 예뻐 큰 감동을 받았다. 마지막 컵은 친언니에게서 받은 것인데 손수 그린 그림이 그려진 컵이다. 컵에 그려진 캐릭터는 내가 그린 것인데 그것을 본 언니가 낙서에 불과하던 내 그림을 컵에 옮겨 굿즈로 만들어 주었다. 이것은 생에 처음으로 내 그림으로 만든 물건이기도 하고 공방에 가서 그림을 그리고 구워내 포장을 해서 이탈리아까지 보내준 언니의 따뜻한 마음이 담긴 컵이기에 의미가 남다르다. 소중한 친구들을 떠올리며 마음이 따뜻해지던 나는 언니가 만들어준 마지막 컵을 찬장 올리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고마운 사람들이 너무 많네. 혼자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늘 곁에 있었네.’
해외에 살면 한국이 그리워질 때가 많다. 남편이 곁에 있어도 채워줄 수 없는 점은 늘 있기 마련이기에 오롯이 혼자 견뎌내야 한다. 그런데 이 3개의 머그컵이 내가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비록 물리적인 거리는 멀지만 항상 마음만은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었다. 이렇게 상대의 마음이 담긴 선물은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나에게 말을 걸어왔고 위로를 건넸다.
혼자가 아니다. 행복은 늘 주변에 머물고 있다. 손을 뻗어 그걸 잡기만 하면 된다. 행복은 본래 생각보다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