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산사순례지, 예산 수덕사로 떠나본다.
세 번째로 떠나볼 산사순례지는 예산에 위치한 수덕사다.
내가 왜 산사순례를 시작했는지가 궁금하다면 아래 글을 참고 바란다.
두 번째 산사순례지였던 서산 개심사와는 차로 30여분 정도 떨어져 있는 곳으로써,
서산 개심사와 예산 수덕사를 함께 둘러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서산 개심사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아래 글을 참고하길 바란다.
수덕사는 덕숭산 남쪽에 자리를 잡고 있다.
근대에 들어 수덕사에서는 경허 스님과 만공 스님과 같은 큰 스님들이 나오신 것으로 유명하며, 덕분에 1984년 수덕사는 덕숭총림으로 승격되었다.
총림이란, 선원, 강원, 율원 및 염불원을 갖추고, 본분종사인 방장의 지도하에 대중이 전진하는 종합수행도량을 말한다.
덕숭총림은 조계종의 8대 총림(조계총림 송광사, 영축총림 통도사, 가야총림 해인사, 덕숭총림 수덕사, 고불총림 백양사, 금정총림 범어사, 팔공총림 동화사, 쌍계총림 쌍계사) 중 하나이며, 선수행의 풍토를 조성한 경허선사와 만공선사로 인해 선풍을 드날린 선지종찰이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 산사순례편> 책에서는
유홍준 교수님이 수덕사를 보며 안타까운 탄식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이유는 백제 시대 때 창건되어 고려 시대에 지어져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목조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로 유명한 대웅전이 있을만큼 그 기나긴 세월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던 곳이었는데, 현대에 들어 어마어마하게 중창불사를 하였고 이로 인해 그 옛스러움과 고유한 멋스러움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일무준을 지나면 둥근 원을 그리면서 돌아가던 그 넓고 한적한 길은 없어지고, 마치 중국 무술영화에서나 본 적이 있을 듯한 다듬어진 돌길에다 돌계단으로 화려의 극을 달린다.
-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 산사순례편> 예산 수덕사와 서산 개심사 중에서 -
자연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 대목을 보고 예산 수덕사에 대한 기대를 내려두었다.
해서 이번 순례에서도 서산 개심사가 메인이었고, 예산 수덕사는 주변에 있으니 한 번 가보는 것이라 마음에 두고 수덕사로 향한 것이다.
일주문을 지나 경내로 가는 길은 책에 소개된 것처럼, 자연보다는 인위의 느낌이 강했다.
보통 산사라 하면 오솔길을 따라 걷다보면 만나게 되는 절이라 생각하는데, 수덕사로 가는 길은 마치 고속도로 공사를 한 것처럼 넓직하게 펼쳐져 있었다.
이 때만 해도, '책에 소개된 것이 맞구나.' 하며,
얼른 대웅전이나 보고 가야겠다 고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계단을 한 참 올라
넓은 마당과 그 앞에 펼쳐진 대웅전을 바라보는 순간
이미 이 곳에 있음에도 이 곳에 다시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넓은 마당이 오히려 호방함과 시원한 느낌을 주었고,
그 가운데 치장을 하나도 하지 않고 맨 얼굴을 드러내듯 그렇게 자리잡은 대웅전은
묘한 조화로움과 평화로움을 만들어냈다.
늦은 오후에 방문해서 그런지 방문객이 거의 없었고,
이로 인해 그 묘한 조화로움과 평화로움을 방해받지 않고 내 마음 깊이 극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유홍준 교수님은 수덕사가 아무리 망가졌어도 이곳에 대웅전 건물이 건재하는 한 수덕사를 무한대로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만큼 수덕사의 대웅전이 주는 건축학적 아름다움이 크다 할 수 있겠다.
수덕사의 대웅전은 고려 충렬왕 34년(1308년)에 세워진 것으로, 현재까지 정확한 창건 연대를 알고 있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 중 하나이다. 국보 제49호로 등록되어 있다.
백제시대 사찰인 수덕사의 창건에 관한 정확한 문헌기록은 현재 남아있지 않으나, 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백제 위덕왕(554-597) 재위 시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석가, 아미타, 약사 삼존불을 모신 이 대웅전은 1937년 수리공사 때 발견된 묵서의 내용으로 보아 1308년 충렬왕 34년에 건립되었다. 건축은 주심포 양식이고 정면 3칸, 측면 4칸 규모의 맞배 지붕이다. 바른 돌쌓기 형식의 기단에 사각형의 자연석으로 기둥 놓을 자리를 붇돋게 조각한 주춧돌을 놓았고, 그 위에 배흘림 기둥을 세웠다. (중략)
외부에 노출된 가구는 나무가 간직하고 있는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며, 측면 맞배지붕의 선과 노출된 목부재의 구도는 아름다움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설명을 잠시 멈춰두고 대웅전을 감상하자.
얼마나 단아하고 기품있는가.
치장한다고 해서 더 아름다운 것이 아님을.
간결하게 필요한 것만 절제되어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그것이 아름다움의 극치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수덕사의 대웅전이다.
말 없이 대웅전 주변을 천천히 걸으며
건축물이 전해주는 그 간결함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음미해본다.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과 마찬가지로 수덕사의 대웅전 측면에도 우리가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불화가 그려져 있지 않다. 그로 인해 단아함과 간결미가 한 층 더해진다.
수덕사 대웅전은 앞서 소개한 안내문에도 나와 있지만 주심포 양식의 맞배 지붕의 양식을 띄고 있다.
특징적인 것 중 하나가 바로 배흘림 기둥인데, 배흘림 기둥하면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이 또 떠오른다.
이처럼 고려 시대 때 만들어진 건축물 중에서는 배흘림 기둥을 가진 건축물을 많이 만나볼 수 있는데, 과연 배흘림 기둥이란 무엇이고 왜 사용하는 것일까?
유홍준 교수님의 책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기둥이 아래에서 위로 곧바로 뻗어올라간 것이 아니라 가운데가 슬쩍 부풀어 탱탱한 팽창감을 느끼게 해주고 윗부분을 좁게 마무리한 기둥을 배흘림이라고 한다. 배흘림기둥은 삼국시대 이래로 우리 목조건축의 중요한 특징이며, 그리스 신전에서도 이 형식이 나타나 이른바 엔타시스(entasis)라고 말하는 것이다. 곰프브리치는 배흘림 기둥을 사용하는 이유로서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엔타시스 형식을 취한) 기둥들은 탄력성 있게 보이며, 기둥 모양이 짓눌린 것 같은 인상을 주지 않은 채 지붕 무게가 기둥을 가볍게 누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마치 살아 있는 물체가 힘 안들이고 짐을 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 산사순례편> 예산 수덕사와 서산 개심사 중에서 -
수덕사는 대웅전도 유명하지만, 사실 이곳에서 머무르며 공부하셨던 분들 때문에 더 유명한 것이 사실이다.
대표적인 인물로 경허 스님과 만공 스님이다. <청춘을 불사르고>의 시인 김일엽 스님이 계셨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이 분들에 대한 이야기는 유홍준 교수님의 책과 <답사 여행의 길잡이4 - 충남> 에 소개된 내용을 바탕으로 간략하게만 전하고자 한다.
경허 스님 이야기
경허는 법호이며 법명은 성우(惺牛)로, 속세의 성은 송(宋)씨였다. 아홉 살 때에 과천 청계사에서 출가하여 한학과 불경을 익혀 1871년에는 동학사의 강사로 추대되었고 따르는 문하가 70~80인에 이르렀다. 서른 살 때인 1879년에 길을 가다가 심한 폭풍우를 만났는데 돌림병이 돈다고 마을사람들이 문을 열어 주지 않아 비를 피하지 못하고 마을 밖에 큰 나무 밑에서 밤새 시달리다가 생사불이(生死不二)의 이치를 문자 속에서만 터득하고 있었음을 깨달아 새로 발심하였다. 이후 한 손에는 칼을 쥐고 목 밑에는 송곳을 꽂은 널빤지를 놓아 졸음을 쫓으면서 자지 않고 정진하였다.
그 뒤로 충청남도 일대의 개심사와 부석사를 오가며 후학을 지도하여 선풍을 크게 떨쳤다. 깨달음이 크므로 계율에 얽매이지 않고 선의 일상화를 추구하여, 한센병 걸린 여자와 몇 달을 동침하는가 하면, 술에 만취해서 법당에 오르기도 하는 등 일화를 많이 남겼고 파계승 소리도 들었다. 마침내 1904년에는 사찰을 떠나 머리를 기르고 유관을 쓰고 이름도 박란주(朴蘭州)로 고치고는 서당 훈장노릇을 하며 살다가 1912년 4월 25일에 임종게를 남기고 입적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경허와 만공과 일엽 스님 (답사여행의 길잡이 4 - 충남, 초판 1995., 20쇄 2012., 한국문화유산답사회, 김효형, 목수현, 김성철, 유홍준)
만공 스님 이야기
법명은 월면(月面)이며 속성이 또한 송씨였다.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라는 게송을 읊다가 문득 깨달았으니 경허로부터 전법게(傳法揭)를 받고 수덕사에 금선대를 짓고 참선하며 후학을 지도하였다. 함께 가던 중이 다리가 아파서 더는 못 가겠다고 하자 갑자기 남편과 함께 밭에서 일하던 아낙을 끌어안으니 남편이 소리소리 지르며 쫓아오는 바람에 힘껏 내달아 산을 올랐다. 나중에 그 중이 “왜 그런 짓을 했느냐”고 질책하자 “그게 다 자네 때문일세. 그 바람에 다리 아픈 줄도 모르고 여기까지 왔지 않은가” 하며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렸음을 일깨웠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런 일화는 스승인 경허의 이야기라고 전하기도 하는데 이는 계율에 얽매이지 않고 호방하며 마음을 중시한 경허와 만공의 선풍을 잘 드러내는 것이기에 어느 스님의 일화라도 무방할 것이다. 마곡사 주지로 있던 1937년에 당시 조선총독 데라우치가 조선 31본산 주지들을 불러 조선불교를 일본불교화하려 하자, 총독부 정책에 순응적이던 다른 주지들과는 달리 정면으로 반대하였으며 31본산 주지 중에서 유일하게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경허와 만공과 일엽 스님 (답사여행의 길잡이 4 - 충남, 초판 1995., 20쇄 2012., 한국문화유산답사회, 김효형, 목수현, 김성철, 유홍준)
일엽 스님 이야기
일엽(一葉, 1896~1971) 스님은 출가하기 전에 속세에서 신여성으로 문필가로 날리던 이였다. 속성이 김(金)씨요 본명은 원주(元周)였는데 서울 이화학당에서 공부하고 일본에까지 건너가 수학하였으며 화가 나혜석과 함께 대담한 행동과 필설로 여자의 사회활동을 선구적으로 보여 주고 일깨웠다. 1920년에 문학활동을 시작해 문예지 『폐허』의 동인으로 참가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잡지인 『신여자』를 간행하기도 했으며 1962년에 나온 수상록 『청춘을 불사르고』가 많이 알려져 있다. 20세까지는 기독교 신자였으나 1933년에 수덕사에서 입산하여 만공의 제자가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경허와 만공과 일엽 스님 (답사여행의 길잡이 4 - 충남, 초판 1995., 20쇄 2012., 한국문화유산답사회, 김효형, 목수현, 김성철, 유홍준)
이 세 분은 경허 스님을 시작으로 만공 스님이 그 제자, 그리고 일엽 스님이 만공 스님의 제자로 이어지는 인연을 가지게 됐다. 그리고 그 인연의 한 축에는 수덕사가 있었다. 수덕사에 가면, 만공 스님이 쌓으신 탑도 볼 수 있고, 비록 큰 불당으로 고쳐짓기는 했지만 일엽 스님께서 기거하셨던 견성암의 흔적도 살펴볼 수 있다. 지금도 덕숭총림에는 100여명의 여승이 공부하고 있다고 하니, 경허 스님을 시작으로 하는 인연이 지금도 이어지는 듯 하다.
경허 스님과 만공 스님에 대한 이야기는 소설로도 만나볼 수 있다.
<바보들의 행진>, <고래사냥>, <상도> 등의 시나리오와 소설을 쓴 작가로도 유명한 최인호 작가가 경허 스님과 만공 스님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들을 발표했는데, 장편소설 <길 없는 길>과 <할> 이 바로 그 소설들이다.
두 선사의 어릴 적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깨달음을 얻는 과정과 여러 에피소드들을 만나볼 수 있다.
몇 년에 우연히 이 소설들을 알게 되어 읽었었는데, 소설을 읽을 때만 하더라도 이 두 분이 실존 인물일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그만큼 일반의 시선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기행과 버라이어티 한 삶을 살았기에 당연히 소설가가 창조한 인물인 줄 알았는데, 소설을 읽은 후 실존했던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고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 분들이 공부하고 선풍을 날렸던 곳이 수덕사라고 하니, 감회가 한 층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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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불을 알리는 수덕사의 종소리.
수덕사.
기대하지 않고 갔지만
기대 이상으로 큰 감동을 얻고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