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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꿈 Jan 15. 2023

어떤 친절

고마워 편의점 보이

오래된 호텔에 대한 호기심이 있다. 막상 들어서면 쾌적하고 표준화된 신식 호텔을 그리워할 거면서, 체리색 몰딩이나 촌스러움과 고풍스러움 사이에 있는 가구 같은 걸 보자면 왠지 내가 모르는 이야기가 내게 스며들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염창역에 있는 나이아가라 호텔도 궁금한 곳 중 하나. 강변가에 호젓하게 서 있는 그 호텔을 지나자면 왠지 여기 뭔가 재밌는 게 있을 것 같지 않아? 싶은 호기심이 있었다. 알고보면 나만 아는 아지트가 될 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물론 나다니지 않고 어디서 쉬고 싶은 마음도 컸던 주말.(참고로 호텔은 비추천이다.)


과자랑 마실 것을 두둑히 사서 체크인을 하고, 세상 긴 더울프오브월스트리를 보고, 나혼자산다를 보면서 칼국수랑 치킨을 시켜 먹고 MSG에 취해 잠든 새벽. 어딘가 이상한 기분에 눈을 떠 보니 제기랄 생리를 시작했다. 집에서 멀지도 않은 곳이라 잠옷으로 겸할 추리닝 하나만 달랑 입고 왔는데 몽롱한 정신에 패닉 그자체. 내 인생은 왜 이러는거야 신경질이 뻗쳤다.


새벽 6시. 일단 앞 뒤 안보고 길 건너 편의점으로 향했다. 이게 웬걸 1+1인데다 구입하면 속옷을 준다는 제품이 있었다. 아니 사실 갈아입을 속옷은 가방 안에 있었는데 그땐 너무 패닉이라 속옷도 새로 사야 한다고 착각을 했다. 계산을 하면서 편의점 직원에게 무려 이거 속옷 사은품 주시는 거죠 라고 확인 질문까지 해버렸다.(제품 안에 들어 있다는 답을 들었다.) 누가 봐도 간절한 행인 1. 


계산을 하고 나오자니 입이 말라 다시 뒤돌아 들어가 물과 이온음료를 좀 샀다. 왠지 아랫배부터 허벅지까지 쎄한 것이 곧 생리통이 찾아올 것도 같아 진통제가 있는지 물어봤다. 벌써 두 번째 질문. 편의점보이가 알려준 가판대에는 타이레놀밖에 없었다. 평소 먹던 약이 있어서, 타이레놀을 집어들고는 뒷면을 한참 읽어봐도 생리통은 예시에 없는 것. 이걸 먹어도 되려나, 날 밝으면 집에 갈 거고 아직 많이 아픈 건 아니니까..하면서 내려놓고 음료랑 드립커피 한 잔만 계산을 하려는데 편의점보이가 제꺼 드릴까요, 했다. 일단 제꺼 드시고 이따 약국 문 열면 사서 드세요 라며 자기 가방을 뒤적여 타이레놀 두 알을 가위로 잘라주었다. 그리고는 원래 셀프일 텐데 커피머신까지 뚜벅뚜벅 가서 내리는 버튼까지 눌러주고는 계산대로 돌아갔다. 예기치 않은 친절에 눈물이 핑. 


그제사 생각해보니 그랬다. 어두운 겨울 아침에 호텔 카드를 한 손에 들고 속옷을 사은품으로 준다는 생리대를 한 아름 사 가는 안색 나쁜 손님이 꽤나 마음에 걸렸겠다. 하지만 마음에 걸린다고 모두 친절을 베푸는 건 아니니까, 또 나는 이삼십 분 남짓 마음이 영 상할 대로 상한 상태였으니 그 친절이 깜짝 놀랄 만큼 따뜻했다.  나는 다시 그 낡은 룸으로 돌아갔고 곧 배가 아파왔다. 타이레놀 한 알을 먹으니 금세 괜찮아졌고 나는 날이 밝을 때까지 푹 잘 수 있었다. 정말 고마웠다. 많이 고맙다네 편의점 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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