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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담자 혜운 Nov 01. 2024

배척이 아닌 연대하기 위한 투쟁

배척과 배제, 무시, 방임, 차별, 혐오. 내가 오랫동안 관심 갖는 주제이다. 눈에 띄는 책과 논문들도 대부분 이와 관련된 내용이다. 최근에 읽은 <출근길 지하철: 닫힌 문 앞에서 외친 말들(박경석, 정창조 저)>의 한 부분이다.



장애라는 범주도 애초부터 딱 하고 고정된 채 주어진 게 아니잖아. 그러니께네 상황이나 사회적 조건에 따라서 장애 범주가 어마어마하게 바뀔 수도 있는 거야. 이 사회가 비장애인인 어떤 사람들을 ‘장애화’하면서 차별하는 경우까지 생각을 해보면 진짜 이 범주란 건 훨씬 더 넓어져 버릴 수 있어요. 어떤 시대에는 흑인들이 백인들만큼 이성적이지 않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장애인 취급받기도 했잖아. 어떤 시대에는 성소수자들도 정신장애인으로 여겨져서 탄압받기도 하고, 그게 아니더라도 장애 문제가 다른 억압들이랑 연결되어 있는 것도 분명 사실이니까, 장애문제는 정말로 (딱 고정된 범주의) 장애인들만의 문제가 절대로 아닌거죠. (p. 321)


소수자들의 투쟁이라는 거는 결국 이 세상에서 제대로 감각되지 않던 존재들을 이 세상이 감각할 수 있게끔 드러내는 과정이잖아. 우리가 살아있는 존재고, 존엄한 존재라는 거를 재확인하는 과정인 거지. 이 사람들이 딱 하고 이 사회에 드러나게 되면은 이 사회에 통용되는 기준이라는 게 얼마나 누군가를 배제하고 만들어져 왔는지가 아주 명확하게 보이는 거거든요. (p. 327-328)


이 세상에는 사회가 규정해놓은 ‘정상인’의 속도에 못 따라간다는 이유로 곧바로 더 이상 이 사회가 감각할 필요도 없다고 치부되어 버리는 존재가 정말 많잖아요. 이런 상황을 그대로 두면 정말로 안되는 거죠. 장애인들이 딱 그렇게 사회에서 배제가 된 거고, 차별을 받고 있는 거고 그러니까. 이게 어디 우리한테만 적용되는 이야기겠어? 누구든 그 속도로부터 낙오가 되면은 그렇게 되는 거야. (p.328-329)



지배적인 세력에 수적으로도 한참 밀리는 집단이 있다. 여성, 노동자, 장애인, 성소수자들. 그들은 자신들의 권리와 인권을 위해 열심히 싸워왔다. 소수집단의 인권, 권리 운동을 하는 가운데 알게 모르게 서로가 각자의 이익만을 위해 싸운다고 주장하며 배척하고 소외시키다 결국 혐오 감정이 싹트기도 하는 것 같다.



최근에 읽은 흥미로운 논문(정나리(2022). 한국 청년의 '아픔'에 관한 사회학적 연구: 2000년 이후 불안한 청년 의식의 사회적 기원. 연세대학교 사회학 박사학위 논문.)에서 혐오에 대한 설명이 상세하게 적혀있다.



좌절과 박탈감 속에서 태어난 분노는 강력한 폭발력을 가지지 못한다.  그리고 외부로 표출되지 못한 분노는 안으로 곪아 종기처럼 커져 혐오의 감정으로 분출된다. (...) 혐오는 배제의 감정이자 내재화된 분노의 한 형태다. (...) 혐오는 자신과 다른 특정집단을 소외시키고 배제하는 방식으로 차별을 정당화한다. (...) 분노와 혐오의 감정이 함께 나타나면 경멸이 된다(p.148~168).   



이 시대에 만연한 혐오 감정을 옅게 하기 위해서는 소수가 느끼는 좌절감과 박탈감을 줄여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 '연대'가 필요하다.   


연대와 관련해서 참 좋아하는 말이 있어요. (...)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1994년에 멕시코에서 빈곤이나 억압, 차별 등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었던 선주민이 어떤 사람이 연대를 오니깐 이렇게 말을 했대요. "만약 당신이 나를 도우러 여기 왔다면 그건 시간 낭비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해방이 나의 해방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 왔다면 함께 일해봅니다." (박경석, 정창조 저, 출근길 지하철, p.298)



각자 다른 차별을 겪고 있지만 그 차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국에 만나는 접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의 해방을 위해 집단 별로 사회에 요구하는 목소리는 다르지만 궁극적으로 나아가는 방향은 같을 것이다.


우리끼리 얼마 없는 파이 조각을 서로 빼앗으며 상처 주지 말고 이 판을 짠 지배 세력에 대항하여 그 차별의 벽을 무너뜨렸으면 좋겠다. 우리의 싸움이 우리끼리의 싸움이 아닌 사회 전체 패러다임을 변화시키기 위한 방향으로 나아갔으면 좋겠다. 우리가 갖고 있는 미약한 힘으로 움직여봤자 그 벽에 작은 틈이라도 생길까 의심되지만 한사람 한사람 연대하기 시작하여 그 작은 틈이 여러 곳에서 산발적으로 생겨나면 내 자식이나 다음 세대가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결국 무너뜨릴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다.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꾸며 각자의 자리에서 경험하는 차별이 무엇인지, 각자 집단이 질적으로 어떻게 다른 차별을 경험하는지 더 깊이 헤아려보려고 마음을 다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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