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바닥에 글을 쓰자
노트북보다 느린 글, 느린 마음
요즘 아이를 하원시킨 후에는 바로 앞 모래밭에서 그림을 그린다. 아이는 보통 나뭇가지를 주워서 하트를 그리고 ‘하트 커’ 식으로 할 줄 아는 말을 한다. 나는 아이에게 나뭇가지를 받아 덩달아 그림을 그리는 식이다. 오늘은 아이가 준 나뭇가지로 바닥에 글씨를 썼다. 이응이 많이 들어가는 두세 글자였는데, 무슨 글씨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글을 쓸 때 들었던 마음이 오래 남는다.
흙바닥에 글씨를 쓰는데, ‘어라?’하는 느낌이 들었다. 요즘 글을 쓴다고 하면 핸드폰으로 메모장에 쓰거나 키보드를 두들겨서 쓰거나 했던 건데 문득 손을 크게 움직여 흙을 묻혀 가면서 글씨를 쓰는 게 얼마 만인가 싶었다. 볼펜이 발명되기 전에는 잉크로 글씨를 썼을 것이다. 그러다가 종이를 적셔 버리는 실수를 하기도 했었던 옛사람들이 생각났다.
모래밭에 그림을 그리면 자글자글한 모래가 나뭇가지를 타고 손까지 전해진다. 손의 움직임에 따라 흙과 흙 사이에 나는 길이 보이고, 길이 꺾이거나 곡선을 타고 어떤 자음이나 모음이 되는지 보인다. 아니, 자음이나 모음 이전에 어떤 그림 같다. 내가 오늘 흙바닥에 썼던 3글자가 잘 기억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글자를 오랫동안 봐도 그렇게 된다. 당연히 읽는 한국어이지만, 한국어가 어떻게 생겼나 현미경으로 보듯 아주 가까이서 뜯어보면 미로 같기도 하고 외계어 같기도 한 게 신비롭다.
십 분동안 이 페이지에 쓴 글자 수가 1000자가 넘었다고 노트북 아래에 뜬다. 만약 십 분간 모래밭에 큼지막하게 글씨를 썼다면 몇 글자나 쓸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것은 얼마만큼 중요하고, 어떤 것이 더 가치 있을까. 잘 모르겠지만 많은 말을 하고 싶을 때가 있다면 말을 하지 않고 몸을 느끼고 싶을 때도 있을 것이다. 노트북을 두들기다가 어떤 대단한 말을 하기 위해 1000자를 쓰고 있나, 생각하면 잘 모르겠을 때가 있는 것이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지만, 가끔은 그림을 그리고 싶다. 아주 큰 도화지를 펼쳐 놓고 글자가 되기 이전의 점을 혼신을 다해 찍은 후, 호수 한 번 보고, 구름 한 번 보고, 도화지 한 번 보는 걸 반복하고 싶다. 그런 천천한 일이 내가 손 바쁘게 글을 쓰는 일과 마음의 바쁨이라는 측면에서는 그리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되면, 글을 쓸 때 조금 더 차분해질 수 있을까.
자음과 모음이 되기 이전에 그냥 한 획이었을 때, 점이었을 때가 생각난다. 글자가 그런 것으로 이루어졌다면, 우리는 글자가 되기 이전의 것들도 이뻐해야 할 것이다.
어떤 글의 주제가 되기 전의 단상들, 오늘 조명이 꺼진 아파트 아래로 엄마의 짐을 대신 들어주던 소년, 나와 아이가 미끄럼틀을 타는 모습을 웃으며 바라보던 엄마, 아이를 재우고 나오니 내 방 침대에서 잠들어있는 남편, 그런 모든 모습이 글자가 되기 전의 점이 되는 걸 상상한다.
역시 나에게는 사람의 얼굴이다. 무수한 점으로 이루어진 얼굴. 표정. 몸. 그 어떤 사람. 어떤 사람이든 점과 획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 획이나 한 점을 사랑한다면 미워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남을 보기 전에 나를 먼저 보게 될 것이다. 분명 사랑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모래밭에서 글씨를 쓰며 느낀 것도 그런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