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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맘 Jan 27. 2023

딸에게 삔을 꽂아주는 날, 삔의 지도

우리 집에는 원래 신발장 바로 앞, 집으로 들어올 때 보이고 나갈 때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에 해월이의 삔걸이가 있었다. 길쭉한 천에 삔을 꽂아 한눈에 보관하기 좋게 만들어진 물건이다. 딸을 낳았다고 하니까 주변에서 삔 선물을 어찌나 많이 주던지, 주는 이들의 취향이 덕지덕지 묻은 선물이었다.

어떤 삔은 해월이가 아니라 선물 준 바로 그 사람이 하면 더 어울릴 것 같은데, 싶었던 것도 있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꼭 이야기를 했다. 이거 이모가 하면 예쁘겠어요. 하는 식으로. 그러면 보통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나이가 들어서 이런 거 이제는 못하지.

나는 얼마 전에 삔걸이를  옮겼다. 오 분 거리에 사는 친정 엄마가 집을 들락거리면서 인테리어에 대한 조언을 했기 때문인데, 집에 들어오자마자 저 색색깔의 삔들이 보이는 게 너무 집의 첫인상을 해친다는 거다.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아서, 삔들을 해월이의 방문 뒤쪽으로 숨겼다.

사실 숨기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삔들을 옮기고 한 달 동안 해월이가 삔을 꽂은 적이 다섯 번도 안 될 정도니까 이 정도면 숨겨 놓은 것이 맞다. 오늘 머리를 감고 나오는데 문득 이상했다. 삔을 복도에 놓았을 때는 거의 매일 꽂다가, 방문 뒤로 옮겼다고 30번 중에 5번도 안 꽂는 거는 너무 갭이 큰 거 아닌가?

삔이 복도에 있었을 시절, 나는 아침마다 삔을 들여다봤다. 준비를 마친 후 나가려고 현관으로 가는 길에 보였기 때문이다. 이 옷에 어울리는 삔이 뭔가, 하고 자연스럽게 하나를 고르곤 했다. 삔을 보면 선물준 사람의 얼굴이 보이는 듯했다. 당근마켓으로 물건을 나눔했다가 보답으로 받은 삔, 아들만 있는 언니가 네 덕에 이런 것도 사 본다며 선물한 삔, 엄마가 백화점에서 세 개 만원에 담아온 삔...

오늘도 아이를 등원시킨 후 청소를 하러 방에 들어가서야, 아 맞다 삔 꽂아서 보낼 걸 그랬나 생각했다. 그럼에도 삔을 꽂는 날은 있다. 무언가 허전해 잠깐 멍을 때리다 보면 삔의 존재가 생각날 때, 아이가 보채지 않아서 깔맞춤으로 코디해줄 여유가 있을 때, 이 삔 정말 어울리겠는데 하고 어울리는 삔 하나가 번뜩 생각날 때!

그럴 때, 머릿속의 삔 지도에 따라 성큼성큼 문 뒤쪽으로 걸어간다. 그리고 사람 얼굴이 들어있는 삔, 삔을 찾아서 꽂는다. 그러면 오늘의 삔 꽂기 끝. 삔을 꽂는 날의 특별함을 위해 삔을 옮긴 것이라면, 삔을 매일 꽂지 않는다고 해서 나와 삔이 그렇게 멀어진 건 아닐 것이다.

결혼 후 잘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을 생각해 본다. 별다른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다. 서로 상황이 달라지고, 아이를 키우다 보니 패턴이 바뀌고, 직장을 그만두면서 연락이 끊긴 이들. 얼마 전 친구 행아에게 자주 연락을 못해 미안하다고 했더니, 원래 어른이 되면 스케일이 커지는 거라고, 시간도 벌어지고, 공간도 벌어지는 거라고 대단한 말로 우리의 현재를 변호해 줬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전히 특별한 사이라면서. 사람의 관계가 변하는 것처럼 변하지 않는 것들은 거의 없겠지만, 그래도 여전히 남은 특별함이 있다면 내 마음도 삔처럼 알록달록할 것 같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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