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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맘 Mar 16. 2023

나는 내담자, 상담사를 사랑해도 될까요

상담일기

많이 따랐고, 존경했던 상담 선생님이 있었다. 이십 대 중반즈음부터 스스로에게 정서적 문제가 많다고 생각했던 터라, 늘 상담사를 찾으러 다녔다. 나는 예민했다. 불안, 무기력, 불면 같은 문제였다. 당시 나는 내가 우울증 환자라고 확신했었는데, 막상 큰 정신과에 가서 몇십만 원짜리 검사를 받아도 병명으로 나오는 것이 없었다.


나연씨 같은 경우에는 약이 아니라 상담이 필요해요, 그 말을 듣고는 몇 년 간 상담 선생님을 찾으러 다녔던 것이다. 그러다가 친구의 소개를 받아 만난 손 선생님은, 내가 태어날 때부터 알던 사람 같았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놀라지 않았다. 그런 일을 겪었니, 그랬으면 그렇게 느꼈을 게 당연하지, 하며 따스한 눈빛, 한결같은 어조, 미소로 내 존재를 백지처럼 받아주던 사람이었다. 선생님과의 대화가 나는 그렇게 좋았다.


손 선생님도 나를 특별한 내담자라고 했다. 내 삶이 끝끝내 피워낸 꽃처럼 아름답다고 했다. 나와 상담할 때는 에너지를 소모한다기보다 마치 차오르는 느낌이 든다고도 했다. 나는 그즈음 선생님이 내게 보여주신 사랑을 닮아 나도 선생님을 사랑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마주 보고 따뜻한 커피를 마시고 있으면 우리 사이에 흐르는 파장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어느 상담 회차부터는 슬픈 이야기를 덜 했다. 어차피 나는 괜찮을 테니까. 선생님은 그렇다고 말해주실 걸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은 선생님이 가수 이소라 이야기를 했다. 자신은 한때 이소라의 감성을 참 좋아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답답하다는 느낌이 든다는 거였다. 데뷔 때 하던 이야기는 좋았는데, 시간이 흘러도 늘 같은 이야기를 하고, 항상 같은 자리에서 슬퍼하는 느낌이 답답하다고 했다.


나는 그때 당혹스럽고 의아한 마음이 되었다. 슬픔을 노래하는 사람이 답답하다고 하면, 그건 슬프기 싫은 게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분명, 나는 슬퍼하는 내가 싫지 않았다. 아파하는 내가 꼭 끝끝내 꽃을 피우지 않아도, 흔들리는 채로 그렇게 남겨두는 게 좋았다. 물론, 그런 말들도 선생님께 배운 것이다. 선생님은 내가 점점 밝아지는 게 좋다며 그것을 상담의 성과처럼 뿌듯해하시는 분이었다. 내 상담사였으니, 당연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이상한 생각을 했다. 선생님이 혹시, 내 슬픔을 답답하다고 느끼지는 않을까? 나는 이제, 슬픔으로부터 졸업해야 하는 시기가 되었나? 싶었고, 자연스레 상담 말고 다른 방식으로 나를 돌보게 됐다.


그러고도 몇 년간 선생님은 가끔씩 생각났다. 찾아뵐 때가 됐나 싶었던 적이 많았지만 막상 가지는 못했다. 상담사와 내담자의 관계가 이런 식으로 종결되는 일이 흔하다면 슬프다. 생각해 보면 손 선생님은 내담자를 이끌어야만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기에, 마치 직업병처럼, 나아지는 길이 있고, 우리는 그곳으로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희망처럼 이야기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왜 선생님이라고 슬프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괜찮다고 말하며 웃음으로써 내담자의 가는 길을 등불처럼 밝혀야 했던 것 같다.


나는 선생님에게 사랑과 희망을 배워, 더 많이 웃는 사람이 되어 놓고, 더 스스로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놓고, 어쩌면 선생님의 그늘을 느껴 그 곁을 피해버린 사람이 된 걸까.


나는 아직도 이소라를 좋아한다. 선생님이 답답하다고 했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늘 같은 자리에서 나를 기다려줄 것 같은, 그 한결같이 슬픈 노래들 때문에. "사랑은 비극이어라 그대는 내가 아니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면서, 어쩔 수 없는 사랑의 한계에 대해 계속해서 슬퍼할 수 있는 사람이어서. 나는 그 슬픔 앞에서 마음 놓고 울 수 있어서. 울고 나면, 한계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이라 믿고 싶어 지니까. 끝을 알기에, 더 끌어안고 싶어 지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내 불안과 무기력은 뚜렷한 해결책이 없는 문제들에 기인해 있다. 오늘도 아빠는 돈이 없다고, 돈을 빌려 달라고 전화를 했다. 그러면 나는 슬프다. 아빠가 돈이 없어서 슬프고, 내가 한없이 도울 수는 없는 상황이어서 슬프다. 이 어쩔 수 없는 슬픔에 관해, 언젠가는 정말로 어쩔 줄을 몰랐다. 오늘, 내가 감정을 무사히 언어화하고, 그럼으로써 받아들이고, 씹어 삼켜서 속에 품고, 그걸 가지고도 오늘치 운동을 해내는 사람이 되기까지, 슬펐던 과정이 있었고 늘 슬픔 속에 있었다. 그래서 슬픈 것이 당연했다. 슬퍼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더 잘 슬플 수 있을까에 관한 문제였다.


사실, 이제는 슬픔을 다루는 기술이 많이 생긴 것이다. 아무리 슬퍼서 울고불고하는 날이 있어도, 오늘치 체험처럼 오늘치 슬픔을 받아들인다. 이소라가 노래 밖에서 어떤 생활을 하는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나는 슬픈 글을 써놓고도 글 밖에서는 잘 웃는다.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에 데굴데굴 구르면서 배를 잡고 웃을 때도 있다.


선생님, 저는 분명히 선생님께 도움 받았어요. 그것을 알고 있어요.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고요. 선생님과 제가, 어쩌면 상담사와 내담자가 아니라, 그냥 친한 친구가 될 수도 있을까요. 저는 선생님의 슬픔이 궁금해요. 그것을 듣고 싶고요.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요.


이런 편지를 쓴다면 그건 오만함일까 생각한다. 선생님은 분명 나보다 쉽게 희망으로 가는 길을 찾는 사람이고, 누군가의 고통 앞에서 같이 아파해 주고, 울어줄 마음의 능력이 있는 사람임을 아니까. 다만, 상담사라는 그 위치성 때문에, 내담자 앞에서 눈물을 흘릴 수 없고, 아픈 감정을 약간은 배제해 내면서까지 더 좋은 이야기, 최대한 힘이 되는 이야기를 해내야만 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이제 어떻게 선생님께 다가가야 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분명히 삶은 슬프다. 우리는 슬픈 일들 속에 놓여 있고, 그러므로 슬퍼야 하고, 슬플 수밖에 없고, 슬프지 않으면 더 슬플 것 같은, 눈물이라도 흘리지 않으면 정말로 더 부서져버릴 것 같은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맞다. 세상에는 슬픈 일들이 많이 일어나니까. 늘 누가 죽고, 누가 아프다. 그들은 꼭,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울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 나는 울고 싶다. 나는 선생님께 울고 싶을 때 울 줄 아는 용기에 내해서 배워냈고, 그래서 선생님 앞에서 다시 울고 싶다고 생각한다. 같이 이소라 노래라도 들으며 품에 폭 파묻혀서 울고 나면, 그것은 다시 좋은 상담이 될까. 그런 대화는 분명히 치료다. 내게 힘을 주었던 그 존재에게 다시 찾아가, 내가 다시 힘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고, 우리의 슬픔을 공유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게 내가 하고 싶은 사랑이고, 꿈꾸고 싶은 일이라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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