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영화를 싫어하는 사람이구나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럴 만도 했다. 영화관에 자주 가는 것도 아니고, 보다가 마음에 안 들면 못 참겠다며 뛰쳐나오는 관객이었으니까. 어디 댓글에서 보니, 너무 예민한 관객은 오히려 영화를 즐기기가 힘들다고 한다. 그 말에 문득 공감이 되었다.
배우의 발음, 사소한 대사처리, 연출, 배경음악이 나오는 포인트 같은 걸 유심히 따지고 들기 때문일 것이다. 조금이라도 억지스러운 설정이나 클리셰, 신파 같은 것에 쉽게 영화에 정이 떨어진다는 거지.
삶도 이와 조금 닮았다. 일상은 보통, 단조롭고 그냥 그렇다. 남편의 약간 투정 섞인 말도, 아이의 짜증도 그냥 무던하게 넘어갈 수 있으면 좋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기 싫다고 한마디 내뱉었다고 하루종일 마음이 불편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이런 글은 어떨까. 퇴고 따위 없이, 어떤 자기 검열도 없이 그냥 써지는 대로 써 내려가는 것이다. 얼마 전부터, 동료들끼리 글을 올리고 나누는 온라인 공간을 하나 만들었다. 그것은 상상 이상으로 나에게 숨통이 되어주고 있다.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 쓰면 누군가가 읽어준다는 사실은 가족같이 믿을만한 집단이 하나 더 생긴 것 같은 안락함이다. 힘든 일이 있어도, "글로 쓰면 되지.", 슬프거나 막막해도, "글쓰기 소재가 될 거야."
생각해 보면 내가 애초에 글을 쓸 수밖에 없다고 믿었던 이유도 그거였다. 중학교 1학년 교과서에 나왔던, 정호승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아픔을 어떻게 끌어안고 품으며 살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갈 곳 없던 내 아픔, 상처를 종이 위에서는 펼칠 수 있다. 단어가 모여 문장이 되고, 문장이 모여 글이 된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감동적이었다.
이번 주에는 아이가 아팠다. 그래서일까, 나 자신을 돌보고 싶은 나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나를 사랑한다는, 너무 당연하지만 인식할 수 없는, 때로 잘 인식할 필요도 없는 사실에 대해서 말이다. 중요한 사실 하나는, 예민한 관객이 영화 관람을 싫어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영화를 너무 좋아해서, 정말 마음에 드는 영화를 찾기가 까다롭다는 말에 더 어울린다. 정말 좋아하는 영화는 50번도 넘게 보고 싶고, 늘 마음에 품고 사는 사람이다.
삶을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고, 그래서 자주 아프더라도, 나는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 사실 앞에 선다. 글을 쓰면서 자주. 내가 어떤 이인지를 살핀다. 그게 좋다. 필요 이상으로 진지해지려는 건 아니다. 다만 내면의 깊이를 드러내고 싶을 뿐이다. 끊임없이 돌을 던짐으로써. 돌이 단어라면, 호수가 흰 종이가 되길. 흰 종이 앞에서 조금씩 더 자유롭고 싶다. 한 마리 백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