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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맘 Oct 24. 2023

남편을 사랑하기로 결심하다

사랑의 신이 계시다면

몸의 어디가 고장이 났다. 열이 39.7도까지 올라갔고, 온몸을 발발 떨다가, 죽밖에 먹을 수 없었다. 집안일을 딱 5일 쉬었더니 집이 거의 쓰레기장이 되어 버렸다.

남편은 나를 대신해 밀린 설거지를 하고, 바닥을 깨끗한 걸레로 닦고, 탈출해버린 쓰레기들을 한데 모았다. 그 두껍고 거친 손으로 쓰레기들을 어르고 달랬을 것이다. 종량제봉투를 꾸역꾸역 묶으며 나랑 같이 쓰레기장으로 가자, 너도 가자, 너도 이리와, 했을 것이다. 남편이 거실에서 한동안 절제된 움직임을 하고 나자 집이 모델하우스처럼 깨끗해져 있었다.

그렇게 청소를 해놓고 나서 남편은 아이를 데리고 외출해 주었다. 놀이터에서 외국인 친구들을 만나 신나게 놀았다는데, 집에 돌아온 아이의 표정이 다림질한 듯 밝아져 있었다. 몸으로 한바탕 놀고 난 후의 아이는 잠시간 조용하다. 찰흙을 만지며 놀거나 스티커를 여기저기 붙이며 말없이 논다. 나도 그런 아이 옆에서 푹 젖은 빨래처럼 최대한 침대와 깊숙이 스킨십하고 있었다.

그럴 때도 남편은 나와 침대 사이를 질투하지 않아 줬다. 밤잠 안자가며 일하는 남편이 딱 서른시간 즈음 쉬어가는 주말에 이 정도 배려라니, 감동이다. 이런 주말, 남편 덕분에 나는 편안하다. 그렇기 때문에 남편을 사랑하는 건 쉽다. 고마워서, 존경스러워서, 미안해서, 사랑의 마음이 솟아나는 것은 공원에 설치된 자동 분수 같다. 퐁퐁 솟아오른다.

물론, 매번 남편이 천사인 건 아니다. 가끔 짜증도 내고, 잔소리도 한다. 나를 보며 한숨을 쉴 때도 있다. 그럴 때 나는 결심한다. 남편을 사랑하기 힘들 때, 남편에게 고맙지 않은 사막 같은 마음에서도, 전혀 미안하지 않은 폐허 같은 마음에서도, 그를 사랑하고 싶다. 그냥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하루를 수고했다고 말해내고 싶다. 영양제를 먹으라고 챙겨주고 싶다. 따뜻한 국이라도 하나 끓여 주고 싶다.

이 년 이상 연애해 본 적 없어서 그런지, 동료애나 동지애로 누군가를 사랑한다 말하는 게 유독 어려웠다. 그러나 사 년을 꽉 채워 곁에 있어준 사람. 앞으로도 내 곁에 있을 사람 앞에서, 나는 점점 설렘을 넘어, 또 다른 감정으로의 도약을 허용하는 사랑이 된다. 사랑의 정의가 남편으로 인해 확장되고 있다는 게 어렴풋이 느껴진다.

에리히 프롬이 <사랑의 기술>에서 그랬던가. '사랑은 결심'이라고. 사랑은 공원의 자동 분수가 아닐 것이다. 차라리 사랑은 전기 하나 없는 오지나 사막, 산골짜기에서도 흘러넘치는 무엇일 것이다. 그 깊은 샘물 같은 사랑이 뭔지 아직도 잘 모르지만, 그저 오늘도 천천히, 조금씩 사랑하기로 한다.

사랑이 어렵기는 해도, 한편으로는 단순한 그 무엇이었으면 한다. '사랑한다' 말하고, 국을 끓이고, 저녁에 뽀뽀를 하다 보면, 가까워질 그 무언가였으면 한다. 사랑의 신이 존재한다면, 넓은 팔로 우리 가족을 감싸 안아 이곳에 머물 수 있도록 지켜내 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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