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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도하 Sep 26. 2021

웰빙을 지나 웰다잉(well-dying)의 시대로

자살을 할까, 커피나 한 잔 할까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많은 것들을 준비하고 또 계획한다. 데이크 코스, 하루 일과, To Do List와 같은 단기 계획부터 대입 시험, 자격증 시험, 면접, 결혼식과 같이 삶의 변곡점을 만들어 줄 장기 계획까지 우리의 삶은 크고 작은 방점들이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는 모자이크처럼 수많은 계획의 응집으로 이루어진다. 계획의 수립과 이행은 결과로 이어지고, 그 결과는 또 다른 계획의 밑그림이 된다. 가끔은 살기 위해 사는 건지, 계획하기 위해 사는 건지 헷갈릴 정도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우리는 삶이라 부른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런 과정을 지겹도록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걸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사는 삶'을 위해서라 답한다. 삶의 목표가 잘 사는 것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설사 계획의 방향이나 순간의 선택이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진다 한들 결과론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잘못된 판단에 불과할 뿐, '잘 사는 삶'이라는 전제마저 왜곡되는 건 아니다. 범인(凡人)은 이해할 수 없는 종교적 이유나 업보를 씻기 위한 자발적 고행이 아닌 이상 가시밭길을 맨발로 순례하고자 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잘 사는 삶'이란 무엇인가. 친구가 농담을 빙자해 무심코 던진 한 마디가, 평범한 술자리를 인생 강의의 장으로 바꿔놓길 좋아하는 대학교 선배가 역설하는 주제가 '잘'이란 단어에 함의된 시대적 이데올로기와 기표 너머의 의미를 반추하게 만들곤 한다. 너도 이제는 좀 잘 살아야 하지 않겠어?라는 한 마디가.




잘 먹기, 잘 자기, 잘 살기

새마을 운동의 구호 '잘 살아 보세'를 기억하는가. 새마을 운동은 1970년부터 시작된 범국민적 지역사회 개발 운동으로 빈곤 퇴치와 지역사회개발을 목적으로 시작됐다. 근대화 시대가 부르짖었던 '잘 사는 삶'은 가족 구성원 모두가 배 곪지 않고 풍족하게 먹을 수 있는 삶이었다. 근대화 시대의 기틀이자 상징이기도 한 새마을 운동의 노동요에는 당대가 추구했던 '잘 사는 삶'이 용광로 속 쇳물에 용해된 금속처럼 가사 곳곳에 스며들어 있어 비장함마저 느껴진다. 특히 노동요 속 '부귀영화'란 네 글자는 새마을 운동 시대가 목이 터지도록 부르짖었던 이상적인 삶을 대변한다.




잘 살아 보세 잘 살아 보세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세
금수나강산 어여쁜 나라 한마음으로 가꿔가며
알뜰한 살림 재미도 절로 부귀영화 우리 것이다
잘 살아 보세 잘 살아 보세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세

-체조 건전 국민가요, 잘 살아보세 中




산업화는 많은 이들의 삶을 풍요롭게 했으나 모든 이들이 잘 사는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인간의 본질적인 고통을 외면한 맹목적인 산업화는 무자비한 철거, 도시와 농촌 간 소득격차, 정신적 공황 등 많은 문제를 야기했고 일부 노동자들을 새마을 운동의 구호와 정반대되는 상황 속에 몰아넣었다. 이들의 호소는 '잘 살아 보세'를 외치는 대국민의 힘찬 목소리에 묻혀 대의를 위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희생으로 치부되었다. 누군가가 잘 살아보자 목이 터져라 외칠 때 반대 선상에 선 누군가는 목이 잘려 나가고, 한 집단이 자발적 희생을 강요당할 때 반대 선상의 집단은 타인의 죽음을 연료 삼아 호의호식하는 아이러니 속에서 우리는 배운다. 중요한 건 '얼마나' 잘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잘 사느냐라는 걸. 




그리고 1990년대부터 꾸준히 대두되어 온 '어떻게'에 대한 니즈는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웰빙(Well-being)'이란 이름으로 자리 잡았다.




웰빙(Well-being)
육체적·정신적 건강의 조화를 통해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추구하는 삶의 유형이나 문화를 통틀어 일컫는 개념




웰빙(Well-being)이 추구하는 삶은 육체적 질병이 없는 건강하고 풍요로운 상태뿐만 아니라 심리적 안정, 가족 간의 유대, 개인의 삶에서 느끼는 성취감 등 무형의 가치와 밸런스를 이루며 살아가는 삶이다.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핵심 키워드로 떠오른 웰빙은 물질적 풍요 외 다른 가치를 경시 여겼던 산업 고도화의 문제점을 비판하며 건강한 삶, 잘 사는 삶의 지표로 떠올랐다.




밸런스의 강조는 또 다른 신조어를 낳기도 했는데 그중 하나가 일과 삶의 밸런스를 뜻하는 '워라밸(Work-life balance)'이다. '요즘 애들'의 필수 옵션이기도 한 워라밸은 2000년 경부터 SNS와 매스 미디어를 주축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워라밸은 곤궁해진 노동 현실이나 직장 내 부조리를 고발하고자 할 때 밈(meme)으로 소비되는 걸 넘어서서 사람들의 라이프 스타일과 전반적인 사회 구조까지 변혁을 가져왔다. 우리나라에선 신조어로 취급되지만 사실 워라밸은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었던 1970년 후반 경 영국에서 개인의 업무와 사생활 간의 균형을 묘사하는 단어로 처음 등장했다. 무려 반세기라는 어마어마한 시차를 극복한 끝에 2018년 소비 트랜드로 공식 선정된 셈이다. 이 외에도 스라밸 (study-life balance), 워라하(Work and life harmony) 등의 신조어 탄생 배경과 이를 추구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은 '잘'의 의미가 물질의 축적에서 물질과 정신의 밸런스로 기울고 있다는 반증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21세기,

고령화가 낳은 수많은 질병과 가족 해체, 1인 가구의 확산 등 현시대가 맞닥뜨린 다양한 사회 문제는 우리에게 또 다른 쟁점을 던져준다. 독야청청 인생을 꾸려나가고 노후를 준비해야 하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사회는 그들에게 더 많은 준비, 더 많은 계획을 요구한다. 이전에는 자식 농사로 대체되거나 아예 등한시되었던 노후 준비가 전무후무로 주목받고 있는 고령화 시대, 노후 준비의 피날레이자 '잘 사는 삶'의 종지부를 찍어 줄 인생의 마지막 준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바로 죽음의, 죽음에 의한, 죽음을 위한 준비다.




잘 먹기, 잘 자기, 잘 살기 + 잘 죽기


세상에 죽음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겨우살이를 준비하면서도 죽음은 준비하지 않는다.
-레프 톨스토이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잘 죽는 것'이 '잘 사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고 말했다.'잘 사는 것'이란 말은 우리에게 익숙한 개념으로 다가오는 반면, '잘 죽는 것'이란 말은 문맥상 틀린 부분은 없으나 어딘지 어폐가 있는 말처럼 느껴진다. 이는 '잘 죽었다'라는 표현이 사회에서 문자 그대로의 의미보다 반어법이나 조롱으로 사용되어 왔기 때문이고, 예로부터 죽음을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라 여겨 가치 판단을 금했던 무속 신앙의 관점이 우리의 의식 곳곳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죽음의 질을 감히 판단해선 안 된다 여겼던 후진적 인식은 사회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죽음은 하나의 현상일 뿐이며 이를 잘 다스리는 것이야말로 '잘 사는 삶'의 핵심이란 인식으로 변화하고 있다. 그 변화의 중심에 웰다잉(well-dying)이 있다.




웰다잉은 '잘 사는 삶'의 매듭이자 웰빙의 마지막 단계로 살아온 날을 아름답게 정리하는, 평안한 삶의 마무리를 뜻한다. 본래 웰다잉은 긍정심리학 분야에서 연구되던 웰빙 개념이 대중의 주목을 받게 되면서 등장한 개념으로 '삶의 질 뿐만 아니라 죽음의 질도 중요하다'라는 역발상이 고령화 시대의 문제점과 합병하여 생겨난 흐름이다. 기존의 웰다잉은 호스피스 · 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을 뜻하는 웰다잉법 개념으로 사용되었지만 현재는 물리적 죽음에만 국한되지 않고 저마다 바람직하다 생각하는 죽음의 형태를 미리 준비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웰빙(well-being)을 지나 웰다잉(well-dying) 시대로

웰다잉은 수시로 건강 체크하기, 고독사 예방을 위한 환경 조성하기, 법적 효력이 있는 유언장 · 자서전 작성하기, 사전의료의향서 작성하기와 같은 신체적 · 물질적 측면과 자성의 시간 갖기, 가족들과 주기적으로 모임 갖기, 나의 신변을 자유자재로 정리하는 엔딩 노트 작성과 같은 정신적 · 대인관계적 측면까지 범위가 다양하다. 개인의 취향과 기호에 따라 버킷리스트 실현하기부터 입관 체험처럼 액티비티가 가미된 활동까지 다양한 준비를 할 수 있다.







행복한 죽음, 아름다운 죽음을 위한 준비는 외국에선 이미 오래전부터 논의되어 온 주제다. 미국, 영국, 독일, 스웨덴, 러시아 등 세계 각국에서는 초 · 중 · 고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죽음준비교육과 캠페인을 시행하고 있으며 미국 같은 경우 보건학 · 철학 · 의학 분야에 이르는 다양한 학과에서 수천 개의 죽음 관련 강좌를 찾아볼 수 있다. 각 나라별로 교육 시기와 프로그램은 다르지만 모두 더 나은 죽음을 위해 현재를 재설계하고 보다 의미있고 가치 있는 삶을 살기 위함을 목적으로 한다.




한국보다 앞서 고령화 사회를 지나고 있는 일본은 어떨까. 일본 역시 웰다잉에 대한 국민의 관심도와 의식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한국에 워라밸이 있다면 일본에는 취업 활동을 나타내는 취활, 결혼 준비를 나타내는 혼활 등 단어의 끝에 -활(活)이란 글자를 붙이는 사회적 트렌드가 있다. 그중 종활(終活)은 웰다잉에 해당하는 개념으로 장례나 묘지 준비, 유언장 작성, 재산상속, 주거 및 가재 처분, 각종 사후 행정처리 등과 관련된 일련의 활동을 포함한다.




반면 우리나라는 호스피스 완화 병동을 운영하는 곳이 한 군데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웰다잉에 대한 사회적 뒷받침이 미비한 상황이다. 최근 들어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죽음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추세지만 아직도 죽음을 선악 구분의 대상으로 여기고 꺼려하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고령화 사회로 접어든 만큼 사회 전반에 결쳐져 있는 죽음의 부정적 인식을 바로잡고 이와 관련된 제도 개선을 위한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호상(好喪)이야말로 '잘 죽는 것'이라 여겼다. 호상의 의미는 사랑하는 친지, 가족들과 함께 익숙한 장소에서 평화롭게 맞이하는 죽음을 뜻하지만 넓은 의미로 고인이 살아온 인생 전체와 상례에 관한 모든 절차를 포함하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맞이한 죽음이라도 대비가 갖춰져 있지 않은 갑작스러운 죽음은 사후 행정처리 과정에서의 혼선을 빚고 남아 있는 사람들을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게 해 애도의 시간마저 앗아간다. 반대로 제아무리 많은 부를 축적하고 살았을지언정 중환자실의 철제 침대에서 나 홀로 맞이하는 죽음은 삶의 긍정적이었던 부분까지 비참하고 쓸쓸한 죽음의 한 장면으로 귀결시켜 가치를 퇴색시킨다. 이처럼 호상을 위해서는 단순히 숨이 끊어지는 찰나의 순간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잘 사는 삶'에 두 발 딛고 선 채 '잘 죽을 준비'를 해야 한다. 잘 사는 것과 잘 죽는 것은 무관하지 않다.




죽음이 언제 어떻게 우리의 이름을 호명할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예측할 수도, 가늠할 수도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시시때때로 우리를 덮쳐오는 압도적인 공포 앞에서 겸허해질 수 있도록, 귀중한 노년의 시간을 허무와 불안이란 이름의 수챗구멍 속으로 흘려보내지 않도록 A부터 Z까지 철두철미하게 준비하는 것뿐이다. 본래 미지의 존재에 대한 공포는 대상의 실체와 근원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옅어지기 마련이다. 유비무환에 가까운 준비는 죽음의 실체에 보다 가까이 다가서게 하고 막연하기만 했던 공포를 우리의 일상 곳곳에 희석시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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