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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도하 Oct 11. 2021

우리는 '언제' 죽는가

자살을 할까 커피나 한 잔 할까




최초로 죽음을 경험했던 순간을 기억한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기르던 햄스터 한 쌍이 있었다. 햄스터는 자기만의 영역을 갖고 생활하는 습성이 있어 자신의 영역에 다른 동물이 들어오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 고로 1 케이지 1 햄스터가 절대적 원칙이지만 당시엔 동물권 의식이 희박하고 햄스터 사육법에 대한 지식을 얻기도 쉽지 않아 다수의 햄스터를 합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종의 특성을 무시한 사육 방식은 당시 다량 유입되었던 햄스터 종에게 '귀여운 외양과 달리 동족 포식을 일삼는 극악무도한 종'이란 낙인을 찍었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무지한 초등학생의 손에 떨어진 햄스터 한 쌍은 좁은 케이지 안에 갇힌 채 쳇바퀴를 돌려야 했다. 합사의 스트레스 때문인지 햄스터 한 쌍은 활동 시간인 밤이 되면 맹렬하게 싸워대며 내 단잠을 깨우곤 했다. 나는 밤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분리의 필요성을 느끼진 못했다. 혼자 있으면 심심하고 외로울 거란 생각에서였다. 전지적 어린아이 시점으로 사고하는 게 최선이었던 초등학교 저학년은 늘 투닥거리면서도 붙어다니는 부모님이나 친구들과의 복잡다난한 관계성을 햄스터의 생태적 습성에 대입하여 해석하는, 지극히 어린 아이다운 무지를 저질렀다. 지금 생각하면 무척 죄스러운 일이다.




몇 주 후, 결국 사단이 났다. 그날도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먹이를 주기 위해 케이지를 살피다가 수컷이 암컷의 머리를 뜯어먹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고 비명을 질렀던 기억이 난다. 햄스터 암컷은 이미 머리와 다리 부위의 가죽이 상당 부분 뜯겨져 나가 살과 뼈가 바깥으로 드러난 상태였다. 쇼크를 받은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대성통곡했다. 부모님은 작은 박스에 햄스터 사체를 넣어주셨고 나는 박스 안의 빈 공간을 길가에 피어 있는 이름 모를 꽃들로 채운 후 집 앞 은행나무 아래 묻어줬다. 집으로 돌아오니 햄스터 수컷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화롭게 쳇바퀴를 돌리고 있었다. 이렇게 작고 사랑스러운 생명체가 그런 일을 저지르다니. 햄스터의 습성을 이해할 수 없는 내겐 햄스터의 동족 포식이 선악을 다뤄야 하는 문제로 여겨졌다. 그러나 여전히 작고 귀엽다는 이유로, 또 모든 걸 금방 망각하는 나이란 이유로 햄스터는 쉽게 용서(?) 받았고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일을 까맣게 잊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게 '죽음'은 동화책 속에나 등장하는 관념적이고 모호한 개념이었다. 동화 속 주인공들은 죽음을 맞이한 후에도 육체와 별도의 개성적 실체를 지닌 존재가 되어 사람들 앞에 나타나거나 이승의 대소사를 자유롭게 관음했기 때문에 나는 죽음을 일시적 소통 불능의 상태 내지는 감기몸살 같은 특수한 상태 정도로 인식했다. 반려동물의 죽음 이후 나는 몇 차례의 죽음을 더 경험하고 죽음이란 생명체의 완전한 무화(無化)이며 완벽에 가까운 단절이란 걸 체득했다. 아마 많은 아이들이 나처럼 반려동물을 통해 죽음을 간접 경험하고 단절에서 오는 슬픔을 견디며 어른이 되어 가리라.




죽음
명사 죽는 일. 생물의 생명이 없어지는 현상으로 사망(死亡)을 뜻한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의 사전적 정의는 '생물의 생명이 없어지는 현상'으로 간단 명료하고 명쾌하지만, 우리가 사회관계망 안에서의 경험하는 실지적인 죽음과 우리의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는 죽음의 심상은 전혀 다르다. 현대의학, 과학, 철학을 비롯한 수많은 분야에서 다루는 죽음도 마찬가지다.




현대의학에서의 죽음

오늘날 현대인의 75퍼센트에 달하는 사람들이 의료 기관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의료 기관에서의 임종이 보편화되면서 죽음의 이미지는 상당 부분 병원의 하얀 시트나 Flatline을 그리고 있는 심전도기로 대체되어 왔다. 병원의 이미지도 마찬가지다. 비상구 불빛이 어슴푸레하게 빛나는 복도와 기계음 소리로 가득한 중환자실에 드리워진 죽음의 이미지를 걷어내기란 쉽지 않다.




현대 의학은 죽음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저항해야 하는 것', '극복해야 하는 것'으로 다룬다. 이러한 관점은 곧 현대사회가 죽음을 정의하는 기준과도 같다. 실제로 우리가 죽음과 삶을 가르는 잣대는 의학 발달을 기준으로 변화해왔다. 그 시작은 심정지다. 과거에는 정지한 심장을 다시 뛰게 할 방도가 없었기 때문에 심장이 정지하는 순간이 곧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였다. 그 후 정지한 심장을 소생하게 하는 심폐 소생술과 제세동기가 개발되면서 죽음의 기준은 심정지에서 뇌의 기능 정지로 이동했다.




뇌의 기능 정지는 두 가지로 분류된다. 생명을 유지하는 부위는 멀쩡하지만 다른 부위가 손상된 '식물인간 상태'와 뇌의 전반적인 기능이 모두 정지한 '뇌사' 상태다. 식물인간 상태의 경우 환자가 오랫동안 잠들어 있다가 기적적으로 깨어나는 사례가 수차례 보고되었기 때문에 현대의학에선 이를 살아 있는 상태로 분류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뇌정지설은 후자에 속하며 1960년대 이후 많은 나라에서 뇌사 상태를 죽음으로 분류하고 있다.




일각에선 세포 기능 정지가 죽음의 기준이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참수형을 당한 죄수의 머리가 몇 초 동안 꿈틀거렸다던가 머리가 잘린 닭의 몸뚱이가 날개를 퍼덕이며 돌아다녔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즉사했음이 극명한 상황임에도 아직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였다는 일화들은 좀비물 같은 공포영화를 연상케하지만 현대의학의 관점에선 충분히 근거 있는 이야기다. 실제로 참수를 당해도 심장은 곧바로 멈추지 않으며 뇌도 얼마 동안은 활동한다. 뇌를 향한 혈류가 끊어져 영양소의 공급이 중단돼도 우리 몸의 세포들이 ATP 형태로 저장해 둔 에너지원을 자체적으로 꺼내어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모든 세포가 생명 활동을 멈추고 자체 효소와 부패균의 활동에게 지배당해 완전히 무너지기 전까진 '살아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현대 의학으로 극복 가능하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물론 무너져가는 세포를 완전히 되살려놓는 기술이 개발되어야 한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지금이야 판타지처럼 느껴지지만 제세동기의 개발로 죽음의 정의가 바뀐 걸 보면 영 가능성이 없지만은 않은 것 같다.




법학에서의 죽음

의학에서의 죽음이 심정지나 뇌사 같은 물리적 현상을 기준 삼는 것과 달리 법학에서의 죽음은 일정한 절차를 거쳐 법적으로 사망 선고를 받은 순간을 기준으로 한다. 앞서 이야기했듯 우리나라 판례와 통설은 심정지를 기준으로 사망 시점을 구분한다. 고인이 사망하면 유가족은 사망 사실을 안 날부터 1개월 이내 신고해야 하며 이때 (사망)진단서 또는 (사체)검안서를 첨부해야 한다.




(사망)진단서 
병원에서 의학적으로 환자의 사망 사실에 관하여 증명하는 문서

(사체)검안서
의사가 스스로 진찰하지 않은 사람의 시체에 대하여 그 사인, 사망일시 등에 관하여 의학적 판단을 증명하는 문서




많은 나라가 뇌사 상태를 기준으로 삼고 있는 반면 우리나라는 심정지를 기준으로 사망 시점을 구분한다. 뇌사자의 가족이 뇌사를 통한 사망 판정을 원하거나 장기기증을 원할 경우 뇌사 판정 위원회에서 주치의를 제외한 다른 신경계 의사 2명과 기타 전문가 4명 이상의 합의를 통해 위원 전원 일치를 받아야만 법적인 사망에 이르도록 되어 있다. 의학과 법학 모두 심정지를 기준으로 삶과 죽음을 정의한다는 점에서 맥을 같이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과정은 엄연히 다르다. 현대 의학에서 한 사람이 사망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생사를 오가는 처절한 사투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단념할 수 없는 생에의 의지와 Flatline 위를 오가는 의료진의 가뿐 호흡, 미미한 죽음의 냄새가 감도는 수술실의 냄새와 두꺼운 벽 너머로 희미하게 들려오는 유가족들의 울음 같은 것들이 때론 그 과정을 대신한다. 반면 법학에서의 죽음은 고인의 형이하학적 죽음을 증명해 줄 서류가  일정한 절차를 거쳐 사망 선고에 이르기까지의 행정 과정이다. 이 과정은 철저히 관료화된 시스템 속에서 일률적으로 이루어진다. 불행한 사고로 부모보다 일찍 세상을 뜬 어린아이도, 노역으로 일평생을 소모한 노동자도, 저명한 사회 지도층도 예외는 없다. 그 모든 서사와 맥락은 지워지고 검안서에 기재된 기록만이 죽음을 말한다.




흥미로운 것은 현대 의학에서 가장 마지막 단계 - 즉, 최종적인 죽음의 단계에 해당하는 사망의 순간이 법학에선 사망 선고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중 가장 첫 단계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그 말인즉 현대 의학에서 형이하학적인 사망 상태에 이르렀을지언정 법학에선 사체가 아닌 사람으로 분류된다는 점이다. 이 기간 - 사망 시점부터 선고에 이르기까지의 기간 - 은 마치 신곡의 중간계처럼 삶도 죽음도 아닌 상태로 느껴진다. 과연 이 상태를 우리는 완전한 죽음이라 부를 수 있을까.




물리학에서의 죽음

물리학의 관점에서 본 죽음은 현대의학과 법학이 규정하는 죽음의 범위와 그로부터 파생된 딜레마를 전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해준다. 물리학은 육체가 소멸해도 우리 존재는 소멸하지 않고 우주 어딘가에 '원자'의 형태로서 영속한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원자'란 무엇일까? 원자는 원소의 화학적 성질을 가진 최소 단위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중 일부는 물질이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 가장 작은 단위를 원자(atom)라고 보았다. 빅뱅(대폭발)이 일어난 이후 만들어진 원자들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수소, 헬륨 같은 형태로 38만 년이란 시간을 거쳐 지금 현재도 우주 곳곳에 존재한다.




원자는 사라지지도, 소멸하지도 않는다. 원자의 모임인 분자들은 우리 몸 안에서 종류와 형태를 바꾸지만 분자를 구성하는 원자는 항상 그대로다. 그리고 우리가 죽음에 이르렀을 때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던 물질은 분해되고 산화되지만 원자는 소멸하지 않고 대기의 일부가 되어 세상을 자유롭게 유영하거나 다른 생명체의 몸을 구성한다. 현대의학 관점에서 본 죽음은 저항과 극복 또는 지연의 대상이지만 물리학의 관점에서 본 죽음은 계절의 반복과도 같은 대자연의 일부에 불과하다. 자연 속에서 모든 것은 순환한다. 생명의 탄생과 소멸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 존재가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자연의 일부, 우주의 일부로 영속한다는 물리학의 관점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일말의 희망을 준다. 그러나 여기에 또 하나의 딜레마가 있다. 광활한 우주로 뿔뿔이 흩어진 원자들을 과연 내 존재의 일부라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지칭하는 '나'란 사유하는 인식 주체로 주변의 변화에도 동일성을 지속하는 의식의 통일체다. 그러니 활동을 멈춘 육체가 붕괴되어 의식의 지속성을 잃는 순간 이미 죽음과 다름없지 않은가. 우리를 구성하는 원자가 고대 우주를 떠돌던 원자라 해도 우리에겐 고대 우주의 기억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 육체는 탄소, 암모니아, 인, 불소, 염분 등 수많은 분자 단위의 물질로 구성된 집합이다. 그러나 동일한 구성 물질의 집합을 보기 좋은 형태로 빚어놓는다 한들 '나'라는 인식 주체로서 사유하지 않는 이상 그것은 나라고 할 수 없다. 우리 모두는 시공간 속에서 우연으로 탄생한 우주의 산물이자 우연과 필연의 합작으로 빚어진 유일무이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기억과 기록에 의한 영생
사람이 언제 죽는다고 생각하나?
심장이 총알에 뚫렸을 때? 불치병에 걸렸을 때?
맹독 버섯 수프를 마셨을 때? 아니야! 사람들에게 잊혀졌을 때다.
-오다 에이치로, 원피스 中




한참 만화에 심취해있던 고등학교 시절, 나를 울게 만들었던 만화 속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기억에 의한 영속은 아주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가장 낭만적인 사조다. 고인을 추억할 때 우리는 가슴속에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예술 작품이나 일기 따위의 기록을 남김으로써 과거와 현재 사이의 간극을 메우고 사람들과 '소통한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기록에 의한 회고는 고인이 시공간을 뛰어넘은 존재로 여전히 실존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살아 있어도 죽은 거나 다름없다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현대 기술을 맹신하면서도 기억과 기록으로서의 영속을 꾀하는 역설이야말로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가장 인간다운 사유가 아닐까. 우리가 지금 이 시간에도 세상의 흔적기관으로 남기 위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생산하는 것도 결국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소생하기 위함인지도 모른다.




죽음을 그저 죽음 그 자체로, 기억의 가장 후미진 곳에서 그대로 잊혀지도록 내버려 두고 싶을 때가 있다. 현대 기술과 의학이란 도구로 그 민낯을 해부하다가도 어린 시절 내 눈물이 고여 만들어진 관념의 바다 아래 죽음의 파편을 수장하고 가끔 생각날 때마다 꺼내어 보고 싶을 때가 있다. 가족, 오랜 친구, 가족과도 다름없는 반려동물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 이들의 죽음 앞에서 실지적 죽음의 실체를 규명하는 것이 애도를 위해 바쳐지는 시간보다 의미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때론 사실에 근거한 위로보다 미신에 가까운 의식이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져 줄 때가 있다. 그들과 쌓아 올린 추억이야말로 우리가 남은 삶을 지속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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